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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에서 대한민국까지

남극에서 대한민국까지

: 코로나19로 남극해 고립된 알바트로스 호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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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1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76쪽 | 352g | 140*200*17mm
ISBN13 9788967821296
ISBN10 8967821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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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바다에 멈추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오는 사람도, 우리를 받아주는 곳도 없었다. 배는 그저, 바다 한가운데에 떠있었다.

바이러스. 세상은 변해있었다. 우리 배가 입항할 예정이었던 항구도, 우리가 돌아갔어야 할 도시도, 주변도시와 그 나라도, 그리고 주변 국가들도 모두 우리에게 문을 굳게 닫았다.

어느 밤, 적도 아래 어느 나라에서 과로로 쓰러져 응급실에 누운 날. 아내를 알게 된 지 20년 만에 우린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계획을 실행키로 마음먹었다. 세계 일주. 아직 두 다리에 배낭을 짊어질 힘이 있을 때, 꼭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안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턱끈 펭귄 한 마리가 떠다니는 빙하 위에 홀로 서있었다. 모습이 마치 무인도에 혼자 남겨진 영화 속 주인공처럼 보였다. ‘지금 올라 서있는 빙하가 곧 녹아 없어질 텐데, 쟤는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일까?’라고 잠시 생각하다가 펭귄의 수영 실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자 피식하고 웃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눈 내리는 바다 한가운데 빙하 위에 홀로 선 ‘두 발로 걷는 동물’을 보고 있으니 괜히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빙하와 함께 떠다니던 날. 남극에 와서 처음으로 붉은 노을을 보았다. 저물어가는 태양빛이 빙하의 옆면을 붉게 물들였다. 희고 푸른 유빙들은 노을 지는 태양 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어두워지는 남극 바다에 떠다니는 수백 개의 빙하들이 한순간 빨간 형광물질을 바른 듯 저마다 빛을 뿜었다.

피부가 벗겨지고 살점이 갈기갈기 뜯겨진 펭귄의 사체가 파도 너울에 따라 물 위에서 출렁거렸다. 척추 뼈가 훤히 드러난 붉은 고깃덩이가 내장을 드러낸 채 맑고 차가운 바닷물 위를 떠다녔다. 귀엽던 펭귄의 작고 노란 발바닥 두 개가 가지런히 달려있었다.

역사상 두 번째로 거대하다는 눈앞의 빙산(A-68)도 거대한 지구의 작은 일부일 뿐이고, 우리가 살아온 모든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고향 지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에서는 그저 티끌과도 같은 점일 뿐이다. 하물며 우리는 우주의 끝을 아직 알지 못한다. 상처받고 아파하는 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 역시 티끌 속의 일들이다.

“스콧은 과학적 방법이 뛰어나고, 아문센은 속도와 효율성에 출중하다. 그러나 만약 재난이 들이닥쳐 모든 희망이 사라진다면,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

“우리가 남극에 있는 동안 우리가 떠나온 세상에는 충격적인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비교적 안전지대라고 여겨졌던 남미 대륙에도 확진자들이 발생했으며, 심지어 며칠 전에는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도 첫 확진자가 나왔습니다. 이미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이 국경을 봉쇄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나라들도 국경 봉쇄를 심각하게 고려중입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즉각 남극 탐험을 중지합니다. 우리는 이 배의 입항이 예정되어 있는 아르헨티나가 국경을 봉쇄하기 전까지 최대한 빨리 되돌아가야 합니다. 최대한 서둘러 우리의 입항이 예정된 도시 푸에르토 마드린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배는 평상시 두 개의 엔진으로 이동하지만, 지금 이 시간부터는 비상 엔진 두 개를 추가로 가동하여 엔진 4개를 모두 켜고 최대 속력으로 귀항지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3일간 전속력으로 드레이크 해협을 건널 것입니다.”

남극에서 남미로 되돌아가는 드레이크 해협에서, 결국 우리는 방 안에서 격리 생활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음식도 방 안으로 배달되었고, 모든 출입이 통제되었다. 예상했던 험한 파도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차라리 이 상황이 이곳을 벗어만 나면 곧 잠잠해질, 파도 때문이었으면 더 나았으련만.

우리의 목표는 분명했다. 전속력으로 남극권을 빠져나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공항이나 항구가 셧다운 되기 전에 육지에 내리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

포클랜드 섬. 푸에르토 마드린. 부에노스아이레스. 지난 며칠 서로 다른 곳에서 우리는 세 번의 입항을 거절당했다. 그래도 변치 않는 상황은 지금 우린 다른 곳을 찾아야만 하고,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어디든 우리를 받아주는 곳으로.

우리는 빨리 되돌아가면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계속 ‘거절’당하며 환영받지 못할 신세가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갑판 위에서 만나면 우린 여전히 서로 웃으며 안부를 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말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바다 위에서 식량을 싣고 다가오는 보트를 보며 감사함과 안타까움 속에서 희망을 느껴보려 애썼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식량을 지원해주고 미국을 향해 떠나간 코랄 프린세스 호는 미국으로 향해가던 중 12명의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그 중 2명은 사망하였다.

영사님은 우리 배가 몬테비데오 항구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항구로 찾아오셨다. 우리는 배의 갑판 위에서 부두를 내려 보았다. 바닷물이 항구에 철썩거렸다. 배에서 내릴 수 없는 우리는 배 위에서, 배에 오를 수 없는 영사님은 육지에서. 우리는 멀리서서 목청 높여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멀리서 손을 흔들어주는 영사님의 머리카락이 바다 바람에 휘날리며 헝클어졌다. 그 모습에 나는 이유도 모르게 목이 메어왔다.

살면서 지겹도록 디디고 서있던, 그 아무것도 아니던 ‘땅.을.밟.고. 서.는’ 것조차 감동스럽게 만드는 바다 위의 격리 생활은 예전엔 아무것도 아니던 것을 간절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저기 너에게 표를 구해준다고 하는 사람들 믿지 말고, 너도 네 살 길 찾아가!! 잘 들어. 네 살 길 네가 직접 찾아야 해!”

“우리 중 누군가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더 부담하여 부족한 사람들의 금액을 메꿉시다. 우리는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을 두고 혼자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실수는 크루즈가 출발하는 날짜를 잘못 선택한 것도 아니고, 장소가 남극인 것도 아니야. 우리의 가장 큰 실수는 ‘섀클턴 탐험대’의 흔적을 뒤따라가려고 했던 거라고. 우린 섀클턴 탐험대의 저주를 받아 돌아가지 못하고 고통 받고 있는 거라고.”

그날 나는 죽을 때까지 잊기 힘든 표정을 보았다. 손을 흔들어 주던 사람들의 놀란 표정. 떠나는 버스와 남겨진 우리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사람들의 의아한 눈길.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비로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이 사람들에게 이해되기 시작하던 때의 표정들….

페르난도와 아리엘은 복도에 서서 여느 날과 같이 물통에 물을 채우더니, 물통을 건네주기 전에 우리에게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잖아. 그래서 노래를 준비했어.” 페르난도와 아리엘은 복도에서 우리를 세워놓고 큰 소리로 노래했다.

뜨거운 미역국에서 김이 났다. 밥 냄새와 고추장 냄새가 훅 올라왔다. 나는 수저를 쥔 채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무언가가 한순간에 올라왔다. 눈물이었다. 첫술도 뜨지 못한 채 나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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