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나는 비옥한 땅에 씨앗을 한 줌씩 뿌리고, 황금빛 이삭을 거두기 위해 허리를 숙이며 나를 낳은 사람의 인생행로를 그대로 따라갈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다른 길도 있을 수 없고, 그 어떤 다른 진로도 존재할 수 없다. --- p.21
나의 유년기는 암소 울음소리와 건초 냄새, 정원에 길게 뻗어나간 나무딸기 향기, 집에서 겨우 3, 4백 미터밖에 안 떨어진 브르타뉴 해안을 스쳐지나가는 짜디짠 물보라의 리듬에 맞추어 흘러갔다. 그것은 체험의 즐거움만이 나의 유일한 관심사였던 무사태평한 시절이요, 황금시대였다. --- p.23
끝없이 펼쳐진 쪽빛 하늘, 그리고 어둠이 내리면 그 하늘이 과감하게 드러내는 빛나는 점들의 휘장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지만 이 밤의 배경에서 나는 저 높은 곳 허공에 떠 있는 빛나는 조약돌 같은 것을 보고 저게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오랫동안 불안한 심정으로 그걸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그게 도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p.25
난 나중에 뱃사람이 될 거야. 그들처럼. 입가에 바보 같은 미소를 띠고 먼 바다를 향해 날아올라 배의 갑판에서 산들거리는 바닷바람이 내 뺨을 어루만지도록 내버려둘 거야. --- p.31
인간들은 종종 아주 모순적이다. 그들은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 두려움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리고 그들 자신조차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들을 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 p.82
나는 브르타뉴 지방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밭일, 뱃사람이 되고 싶은 나의 꿈, 숲속 빈터에서의 독일군 장교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 그의 딸 사진을 발견한 일, 마틸드, 그녀와 함께 협만을 따라 걷는 산책에 관해 말해주었다. 그는 내가 어떤 부분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도록 이따금 질문을 던질 뿐 단 한 번도 내 말을 자르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이 지구상의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보이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험은 이때가 처음이어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정말 기뻤다. --- p.129
별은 과학자들이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태양이 폭발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별은 저 높은 곳에서 만개하는 지나간 사랑의 화석이다. 별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 아래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영원히 반짝이며 인간을 구원하는 사랑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빛나고 있다. --- p.161
“베르튄, 인간은 잔인하고, 인생은 배가 고프면 자기 새끼들을 잡아먹는 개나 다름없네. 우리에게 선물 같은 건 하지 않고, 너그럽지도 않다네. 나처럼 되고 싶지 않거든 이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아야 해. 베르튄, 나도 인생을 안 좋아하고 인생도 나를 안 좋아한다네.”
“맞습니다, 선장님. 제가 인생과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선장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는 파이프를 입에서 빼내더니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인생과 화해한다구?”
“그렇습니다, 선장님. 젊은이가 선장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 p.228
우리 모두는 누구나 언젠가는 어른이 되고 만다. 각자의 리듬에 맞추어. 나 역시 그녀 덕분에, 이 세상이 나의 형상을 본떠 그려진 것이 아니라 나의 형상이 이 세상의 그림에 맞춰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던 바로 그날 성장했다. --- p.247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카트린 샤페르가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은 자기 아버지를 닮아 바닷물처럼 푸른색이었고 인정이 넘쳐 보였다.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 동안 나는 내 삶 전체가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밝으며 내가 더 가까이서 바라보면 활짝 웃곤 하는 커다란 분화구투성이인 달의 순환주기와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 p.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