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쩌면 자기 집에 있는 책의 바닷물을 다 빼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학 강단에 가서 연구를 하거나 아니면 나같이 언론사의 기자 피디를 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이 큰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넓은 서재를 두고 살거나 그 집을 책과 함께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가 없고 작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고작이니, 이제 그 책들과 이별해야 할 운명이 가까워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빼버리려고 해도 뺄 데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 도서관도 자리가 좁다며 책을 마구 폐기하는데 나같이 잡종류의 책을 모은 사람들 것을 받아줄 이유가 만무다. 내가 바로 그런 사정에 처해 있다. 그런데 집에 있는 책의 바닷물을 빼버리면 그 속에 살던 물고기나 수초들이 다 말라죽을 운명이 된다. 그 바닷물이 빠지기 전에 할아버지가 어떤 바다를 어떻게 구경했는지, 수영도 못하는 할아버지가 어떤 바닷물에 빠져 어떻게 허우적거렸는지, 그런 이야기라도 남겨놓고 싶은 것이다. 이름하여 ‘책 바다 무작정 헤엄치기’다.
--- p.9
오래된 책은 헌책인가? 고서(古書)인가? 혹은 옛 책인가? 이런 책들을 파는 곳은 헌책방인가, 고서점인가? 옛 책방이란 말은 없으니 일단 헌책과 고서라는 말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이런 질문을 하면 실제로 책방을 경영하는 분들은 ‘고서’란 말을 택할 것 같다. 헌책이란 말은 공연히 헐어서 못쓰게 된 책을 뜻하는 것 같고, 새로 나온 책은 아니지만, 쓸모가 있고 귀한 책은 고서(古書)라고 해야 하지 않겠냐는 뜻일 게다.
그런데 나는 헌책이나 고서보다는 옛 책이란 말이 더 끌린다. 고서라고 하면 옛날 조선 시대나 그 이전에 만들어진 한자(漢字), 한문(漢文)이 가득한 책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차라리 우리가 쓰던 책들 가운데 시간이 지나서 주인을 잃고 나온 것들, 그것이 중국 책이건 일본 책이건 영어책이건 간에, 그런 책들은 옛 책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것 아닌가?
--- p.24
2007년 9월 내가 부산총국장으로 부임하면서 첫 주말에 들린 곳이 보수동이었다. 거기서 마침 황운헌(黃雲軒)이란 시인의 『散調(산조)로 흩어지는 것』이란 시집을 만나서 르네상스 다방을 열었던 박용찬이란 사람과 그 음악다방을 여는 데 애를 쓴 젊은 청년 황운헌의 이야기, 그 시인이 브라질에 이민 갔다가 세상을 뜨기까지의 사연을 알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역사 속에 묻혀버릴 뻔한 한국과 일본의 두 지성의 만남을 알게 되었다. 결국, 부산의 보수동이란 책방 거리의 존재 이유는 확실히 드러났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바닷속에 떠다니는 많은 보물과 그것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도…
--- p.97
이 마을의 ‘책 황제’인 리처드 부스가 이 마을을 ‘고서 왕국’으로 선포한 것은 1977년이지만 처음 책방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인 만큼 마침 그해에 발행된 북한의 잡지가 이곳 리처드 부스의 책방에 있다는 것도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재미있다. 아무튼, 북한 책이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북한을 탈출해서 이곳 영국에 정착한 탈북주민이 갖고 있던 것이 이곳까지 왔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필자가 영국에 특파원으로 있을 2001년 여름, 런던에 사는 탈북주민들은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축구경기를 할 정도였는데, 필자가 취재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환영한다고 했다가 혹 신분 노출로 불이익을 당할까 봐 거부한 적이 있으니 이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일찍 영국이 유럽에서 다른 나라에 앞서 북한과 수교를 하고 외교관을 교환했으니 그들 외교관을 통해 왔을 수도 있다. 아무튼,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하지만 발 없는 책이 수만 리를 온 것이니 어찌 신기하고 반갑지 않겠는가?
--- p.113~114
1993년 9월, 중국의 언론들은 모두 머리기사로 『중국대백과전서(中國大百科全書)』의 편찬출판 완료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모두 74권, 항목 수만도 7만 7000여 개, 글자 수는 자그마치 1억 2000만 자나 된다. 인문과학에서부터 사회과학, 자연과학, 응용과학에 이르기까지를 66개 주제로 나누어 양이 많은 것은 권수를 늘였기 때문에 74권이 됐다. 중국학술계의 몇십 년의 연구수준을 망라하고 세계의 최신과학연구와 문화의 성과를 한데 모은, 중국인들의 손에 의한 최초의 백과사전이다. 1966년 문화대혁명의 기치가 높이 걸린 지 실로 27년 만의 일이다. 문화대혁명으로 문화 망국의 길을 재촉했던 중국은 약 30년 만에 겨우 그때의 손실의 늪을 건널 수 있는 문화의 다리를 건설한 것이며 문화재건의 토대를 쌓은 것이다. 강택민(江澤民) 등 중국의 지도자들은 10월 8일, 사전편찬에 참여했던 학자와 편집자, 출판관계자들을 인민대회당으로 불러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초 이 사업의 의의를 제일 먼저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밀어준 등소평 노인은 비록 공식적인 활동은 하지 않지만 백과전서 완간본을 전달받고 기뻐했을 것이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중국 북경 특파원으로 있던 필자는 당시 이 소식을 한국에 뉴스로 전한 것은 물론, 이렇게 중국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지식의 보고인 백과사전을 소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더 알아보니 이 사전이 모두 74권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분야도 엄청 세밀해서 어쩌면 내가 다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로 인문 역사 문학 철학 등 이른바 문사철을 중심으로 하고 거기에 항공 원자력 동식물 등등 중국이 앞서가고 있는 과학 분야도 고르고 해서 모두 32권을 주문해서 받았다. 말이 32권이지 엄청난 양이고 그것을 많은 돈을 주고 사서 받으니 거실이 꽉 찼다. 그래 할 수 없이 한쪽 벽면을 모두 책장 없는 책꽂이로 옆으로 쌓아 올리니 제법 이런저런 책과 함께 사람 눈높이까지 차올랐다. 그 뒤 한국으로 들어오고 영국 런던에 지국장 겸 특파원으로 다시 나가고 하면서도 이 사전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점점 중국의 컴퓨터망이 발전하고 정보가 다 온라인으로 연결돼 검색이 가능한 상황이 되니 그만큼 용도가 적어져서 이제는 사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열어보지 않는, 일종의 애물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 p.181~183
1938년 3월 14일,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살해된 남경시는 태풍이 휩쓸고 간 폐허 그것이었다.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들도 없고 곳곳에는 포격에 깨어지고 넘어진 벽돌과 시멘트 덩어리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데 주강로(珠江路)에 있는 지질조사소만은 예외였다. 트럭은 사람들을 연신 실어 나르고 있었다. 머리가 허연 사람들이 3층의 먼지 더미 속에서 무언가 부지런히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책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책을 분류하고 있었다. 분류가 끝난 책들은 상자에 담겨 밖으로 실려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남경의 책을 도둑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로서는 도둑질이 아니라 전쟁에 이긴 전리품을 챙긴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도둑질인 것이다.
이 작업에는 특별병력 230명이 투입됐다. 이들은 367명의 사병을 동원해서 남경의 70군데에서 책을 마구 거둬들였다. 여기에는 쿠리(苦力; 막노동 등 힘든 일을 하는 중국인 노동꾼) 880명이 끌려 들어왔다. 그들은 일본군이 시키는 대로 책을 이 지질연구소에 모아주었다. 당시의 군 트럭 300여 대분 88만 권이 이곳에 모였다. 이 책들은 이른바 문화 특무(문화 관계를 전문으로 다루는 밀정들)의 엄격한 검사를 거쳐 일본으로 모두 수송됐다. 별 볼 일 없는 책들은 모두 불에 태워졌다.
--- p.202
허균은 1614년과 1615년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를 다녀오면서 수많은 책을 사서 귀국하였다. 책을 사게 된 것은 당시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욕심이었겠지만 유인길이 그에게 갖다 준 명삼(明蔘) 32냥을 돈으로 바꾸어 샀을 것인데 명삼 32냥은 중국에서는 큰돈이었기에 그렇게 많은 책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유인길이 준 명삼은 공물로 바치고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 뇌물의 성격도 있었다고 보이지만, 여기서는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다만 허균은 그것으로 책을 산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는 그 책을 강릉 호숫가, 곧 경포호 옆의 어느 집에 비치해놓고는 고을의 선비 누구나 와서 빌려보고 반납하도록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도서관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고 그러한 발상을 하게 된 것은 소동파의 글을 읽고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 그러한 생각을 실천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 p.258~259
책을 빌려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빌린 책을 돌려주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라는 ‘이치(二痴)’란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당나라 단성식(段成式)이 쓴 『유양잡조酉陽雜俎』라는 책에 나오는 것인데, 송나라로 내려가면 ‘사치(四痴)’로 늘어납니다. 송나라 방작(方勺)의 『박택편泊宅編』에 나오는 것인데, “借一痴,惜之二痴,索三痴,還四痴”, 곧 “책을 빌려주는 것도 어리석고 그 책을 아까워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며, 책을 찾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고, 책을 돌려주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설은 잘못 전해질 수 있는 모양입니다. 송나라 주휘(周輝)가 쓴 『청파잡지(淸波雜志)』라는 책에는 바보라는 뜻의 치(痴)는 원래 글자가 웃는다는 뜻의 ‘치(嗤)’, 또는 술 단지를 뜻하는 ‘치(希+瓦)’여서 원래 뜻은 “책을 빌려주며 웃고 돌려받으며 웃는다.”, 혹은 “빌릴 때 술 한 단지를 사고 돌려줄 때도 한 단지를 산다.”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책을 빌려주고 돌려주는 일이 그만큼 좋은 일이고, 그래서 서로 술로 기쁨을 나눈다는 뜻이죠. 그것이 발음이 같은 ‘치(痴)’로 전이되면서 책을 빌려주거나 돌려주는 사람 모두 바보라는 뜻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책을 빌릴 때는 술을 사는 관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북경에 가서 많은 책을 사 온 김이수에게 책을 빌리기 위해서 시를 지었는데,
한 병 술 마련하여 그대 집에 보내는 건 解辨君家送
좋은 책 있음을 알고 자주 빌리려는 걸세 知有奇書得得來
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송나라의 여희철(呂希哲)은,
나에게는 책 빌려 오고 술 사는 일뿐 除却借書沽酒外
공사 간에 시끄러운 일이라곤 없네 更無一事擾公私
라고 하였다고 허균이 그의 책 『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 p.313~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