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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플 때마다 글을 썼다

아플 때마다 글을 썼다

: 7년의 투병 생활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리뷰 총점10.0 리뷰 7건 | 판매지수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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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52쪽 | 376g | 135*205*15mm
ISBN13 9791190971164
ISBN10 119097116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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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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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늦은 봄 오후, 나는 독서실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갑자기 목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몸 안에서 내내 압력을 견디던 무언가가 부서져 버린 듯한 당혹스러운 아픔이었다. 독서실을 나와 근처에 있는 정형외과를 찾았다. 엑스레이 사진을 본 의사는 일자목에 목디스크인 것 같다고 했다. 물리치료를 받은 후에도 몸 안의 꺼림칙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왔다. 돌이켜보면 그날은 끝을 알 수 없는 고된 여정이 시작된 날이었다.
--- p.15

몸이 아픈 수많은 사람을 보면서 삶의 본래 모습은 슬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대중문화는 보기 좋은 것만 선별한다.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외모의 주인공들은 몸에 딱 맞는 최신 유행의 옷을 입고 있다. 사람들은 뽐낼 만한 사진만 선별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부서지고 뒤틀리고 초라한 것을 사람들은 멀리한다. 나 또한 그랬다. 한 달 용돈이 이십만 원인데도 무리해서 비싼 브랜드의 옷과 신발을 사곤 했다. 평균 이하의 인간처럼 보일까 봐 늘 불안에 떨었다. 불행은 허위를 깨고 삶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내가 여태껏 좇았던 건 한낱 신기루였을지도 몰랐다.
--- p.36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소화력이 향상된 데다 학교를 다니면서 활동량이 늘어나서인 것 같았다. 44kg 정도였던 체중은 넉 달 만에 57kg이 됐다. 텅 빈 포댓자루 같았던 옷이 차츰 몸에 맞아갔다. 급속도로 살이 찌면서 몸에 이상한 반응이 나타났다. 온몸에서 털이 빠졌다. 머리를 감고 나면 빠진 머리카락이 수챗구멍에 가득 뭉쳐 있었다. 피부에서 각질이 하얗게 일어나고 껍데기가 떨어졌다. 몸이 급속도로 회복되고 새 세포가 왕성하게 만들어지면서 일어나는 현상 같았다. 살이 붙으면서 가장 안도했던 부분은 겨울을 이전보다 수월하게 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빼빼 마른 몸으로 겨울을 나는 건 끔찍한 일이다. 마른 사람은 체온을 보존해줄 지방이 없어 추위를 심하게 타기 때문이다. 이즈음 나는 기나긴 투병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생이라면 지긋지긋하게 했으니 이제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게 될 거라고 믿었다.
--- p.53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엎드려 우는 와중에 이상하게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이 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면 글을 쓰고 싶었다. 내가 겪어낸 아픔을 재료로 누군가의 마음에 위안을 줄 수 있는 글을, 어두운 시간을 견디는 동안 마음에 품고 버틸 수 있는 문장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p.63

육체노동이 가능할 정도로 건강해진 건 아니었지만 더 이상 몸의 괴로움에 시달리며 근근이 살아가지 않아도 됐다. 이번 회복은 나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이 아니었다. 소화가 잘되고, 체중이 늘고, 체력이 좋아지는 걸 한 달, 두 달 지날 때마다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던 투병 생활에 끝이 보이는 듯했다. 이런 순간을 오랫동안 손꼽아 기다려왔지만 한편으론 영원히 보통 사람들처럼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갑자기 광복절 특사로 출소하게 된 무기수처럼 내게는 평범한 삶이 낯설기만 했다. 아프기 시작했을 때 26살이었던 나는 어느덧 33살이 되어 있었다.
--- p.78

기억은 잔인하다. 뇌리에서 지우고 싶은 일일수록 깊게 각인된다. 끔찍한 일들을 잊어버리 싶었지만 이 사건들은 수년이 지나도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고, 불쑥불쑥 떠올라 현재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과거의 기억을 적는 일은 내키지 않는 작업이었다. 희미해진 지난날을 헤집어 어두운 기억을 떠올릴 때면 그때의 고통과 모욕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당시의 수치심, 모멸감, 증오, 억울함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손이 덜덜 떨리고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나는 고고학자가 깨진 유적을 복원하듯이 산산이 부서진 기억의 조각을 하나하나 이어 붙였다. 특정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기간이면 한동안은 복수심과 치욕감이 일상을 지배했다. 굳이 지나간 일을 들춰내 현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 p.93

내게 필요했던 건 바뀌려는 강박이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유로운 마음이었다. 예전의 나는 외향적인 사람이 되면 인생이 바뀔 거라고 믿었지만 진짜 긍정적인 변화는 내향적인 속성을 받아들이는 데서 왔다. 내향성을 억누르는데 에너지를 쏟지 않으니 마음이 이전보다 한결 편하고 여유로워졌다. 마음속의 외향성과 내향성은 사람마다 특정한 비율로 섞여 있다. 스스로의 내향성을 받아들인 후엔 역설적이게도 내 안에 있던 외향성이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외향성은 작위적으로 연출하던 예전의 그것보다 한결 자연스러웠으며 내 본모습과도 충돌하지 않았다. 외향성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난 뒤 나는 예전보다 잘 웃고 잘 웃기는 사람이 됐다. 나의 개그 성공률은 기존 4%에서 9%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 p.113

마음의 혼란이 몸의 병으로 나타나는 걸 수년간의 체험으로 확인하면서 체험하면서 몸이 마음 상태를 알려주는 계기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어지간해선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 오랫동안 반복해온 행동에는 관성이 있어서 설령 그것이 자기 파괴적이라 해도 쉽게 멈출 수 없다. 그럴 때 질병은 비상 브레이크처럼 인간을 멈춰 세우고,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게 한다. 어쩌면 몸은 사람이 자기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아픈 걸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때,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기를 멈출 때, 안정과 사회적 시선이라는 허울에 목매며 자신을 혹사시킬 때, 스스로를 원수처럼 학대할 때 몸은 인간을 깨우쳐 주려고 병이라는 방식으로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 p.141

어둠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는데 거창한 무언가가 필요한 건 아니다. 누군가의 작은 온정, 작은 우정...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진실을 품고 있다면 당사자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준다. 내가 더 이상 이전처럼 고립돼 있는 자폐적인 인간이 아니라면 그것은 나 혼자 해낸 일이 아니다. 창문 없는 컴컴한 방에 웅크리고 있을 때 몇몇 친구들이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노올자, 어서 나와 노올자. 바깥은 햇볕이 쨍쨍하고, 날씨도 좋다. 왕따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나와서 우리랑 놀자...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왕왕 울렸다. 친구들의 선의는 거대하고 무거운 체념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도록 등 떠밀었다. 두터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나를 지켜주었다. - 182p

나비가 되기까지 애벌레는 긴 시간을 기다린다. 기어 다니는 일이 버겁고 생존에의 투쟁이 고통스러워도 그저 살아낸다. 고치의 형태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차디찬 어둠의 시간을 견딘다. 우리가 목격하는 건 한 마리 나비의 그림 같은 모습이지만, 나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랫동안 생명을 간수해오며,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왔다. 세상의 모든 나비는 그런 시간을 건너온 것이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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