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안에 나를 가두지 마라
-- 최세라 (rasse@yes24.com)
관리, 통제, 소유, 보관 그 어떤 형태로도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제 아무리 돈이 많아도, 힘이 세어도, 머리가 좋아도 붙잡을 수가 없는 시간. 크로노스의 발 아래 놓인 인간들은 언제나 그가 휘두는 낫에 속절없이 생명줄이 끊어지고야 만다. 환희, 분노, 슬픔, 사랑 같은 인간의 감정, 계획, 목표, 성취 같은 노력과 의지도 시간 앞에서는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연구는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진행되어 왔다. 눈에 보이는 공간은 이제 어느 정도 정복과 관리를 할 수 있는 통제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시간은 알아보려 할수록 더욱 저만치 달아나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공간 확보는 권력자나 재산가의 바로미터가 되나 아직까지 시간을 돈으로 사두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모든 인간이 공평하게 쥐고 태어난 것이 바로 시간이 아닌가.
이런 시간을 정복한 남자가 있으니 바로 러시아의 학자 류비세프다. 솔직히 그는 시간을 '정복'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 혹은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위해 기록을 했을 뿐이다. 그는 정리와 분류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식물의 분류를 연구한 것이나, 독서의 대부분은 기록으로 남겨 분류한 후 다음 연구에서 십분 활용하였다. 이러한 그가 분류의 대상으로 시간을 선택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진행이었다. 또 한가지, 그는 이미 이십대에 '유기체의 자연적인 분류 체계 확립'이라는 인생의 목표를 정했다. 목표의식과 의지가 강했던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실천. 유기체의 한 부분이었던 자신의 삶부터 분류를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의 분류와 정리로 인한 성과는 상상초월! 평생동안 총 70권의 학술 총서와 12,500여장(단행본 100권 분량)에 달하는 연구논문을 남겼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루 8시간 이상씩 잠을 잤던 이 학자의 다양한 취미활동. 연극, 영화, 음악 같은 공연애호가에 수영을 즐긴 스포츠맨이었고, 동료와 가족, 후배. 심지어 그와 다른 이견으로 맞서는 논쟁자들에게까지 엄청난 양의 편지를 썼으며, 결정적으로 생계를 위해 직장에도 다녔다. 이 괴력을 가진 학자의 시간관리법은 크게 5년 단위 100살까지 잡혀있었으며 1년에 한번씩은 20시간 정도를 들여 1년 시간을 정리했고, 하루는 크게 3등분으로 하여 8시간은 취침, 8시간은 직장 업무, 8시간은 개인적인 연구시간으로 정했다. 또 1시간은 30단위로 쪼개어 기록하였다.(하루 3등분 활용법은 아인슈타인의 시간관리법과 동일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간 분류법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의지와 실천력이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뚝심, 사소한 것도 소중하게 여겼던 마음(그는 '창문에 낀 성에에 관한 연구'도 서슴없이 했다), 권력 혹은 부와 손잡지 않았던 청렴함이 있었다. 이런 올곧은 가치관의 골격이 있었기에 외부 압력에도 시간 분류법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부러운 것은 그의 지칠줄 모르는 건강함이었다.
만약 그의 구체적인 시간 관리법을 배워보고자 이 책을 읽는다면 뒷부분으로 갈수록 실망할 것이다. 이는 류비세프 전기에 가까운 책으로, 시간관리 테크닉을 찾는 이들에게는 약간의 아쉬움을 줄 수 있다. 단지 초반부에 나오는 예들로서 그의 활용법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도 전체적인 틀을 보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그러나 류비세프라는 거목이 당시 비주류로 탄압과 소외를 극복하면서 지금까지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그의 자질과 노력은 뚜렷이 배울 수 있다.
단 하루만이라도 류비세프처럼 시간 기록을 해보라. 가계부를 적어본 경험이 있다면 이미 알 것이다. 한 순간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임을…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류비세프는 자신의 목표를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 시대 그 누구보다도 깨어있었던 행복한 사람이었다. 류비세프가 직접 기록으로 남긴 몇가지 '불운에 휘말리는 재주'를 제외하고…
5세 때 나무를 타다 떨어져 팔이 부러짐
8세 때 널빤지에 다리가 깔렸음
14세 때 곤충 표본을 만들다가 손을 베어 파상풍에 감염되었음
20세 때 급성맹장염을 앓음
1918년에 폐결핵에 걸림
1920년에 폐렴을 앓음
1922년에 발진티푸스에 걸림
1925년에 극심한 신경 쇠약에 시달림
1930년에 이념 논쟁에 휘말려 체포 위기를 겪음
1937년에 레닌그라드에서 박사 학위를 박탈당할 뻔함
1939년에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잘못하여 중이염에 걸림
1946년에 비행기 사고를 당함
1964년에 얼음판에 넘어져 뒤통수를 심하게 부딪힘
1970년에 다리가 부러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