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상황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은 없을 것이다. 우선은 반어적으로 ‘사회’라 불리는 환경과 제도, 개별적 세포들의 모호한 집합체에 구체적인 실체가 없기 때문이고, 나아가 공통의 경험을 위한 언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를 공유하지 않고서는 부 또한 나눌 수 없는 법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가능성을 녹여내기 위해 계몽주의와 결부된 반세기 동안의 싸움이 필요했고, 가공할 ‘복지국가’를 잉태하기 위해 노동을 둘러싼 한 세기 동안의 투쟁이 필요했다. 이른바 새로운 질서를 담아낼 언어를 창출하는 투쟁이었다.
--- pp.14-15
기존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시들어가는 모든 것을 일일이 거론하는 일은 시간 낭비일 것이다. 사람들은 가족이 돌아오고 커플이 합치는 중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가족은 떠났을 때의 그 가족이 이미 아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이미 만연해 있는 이별을 심화시킬 뿐이어서 그 자체가 일종의 기만으로 작용한다. 해마다 거듭되는 가족 모임으로 인해 쌓여가는 서글픔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 억지로 웃는 얼굴들, 너 나 할 것 없이 가식적인 모습을 보는 데 따른 당혹스러움, 식탁 위에 시체 한구가 놓여 있는 것 같은 기분, 그런데도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는 느낌 등등 말이다. 연애에서 이혼까지, 동거에서 재혼 가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처럼 허탈한 가족 중심의 무용성을 예외 없이 실감하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마저도 포기한다면 훨씬 더 서글플 거라 판단하는 것 같다.
--- p.33
마침내 우리는 깨달았다. 경제가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경제 자체의 속성이 곧 위기라는 사실을. 일자리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노동이 남아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건 위기가 아니라 바로 성장이라는 사실을.
--- p.61
하지만 솔직히 말해보자. 그토록 떠들썩하게 이야기되고 있는 이 모든 ‘환경 재앙’에도 우리는 현재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예측 가능한 사태들 중 어느 하나가 실제로 우리를 덮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분명 우리와 관련이 있는 문제이긴 한데, 어쩐지 별 감이 오지는 않는다. 바로 그 사실 자체가 재앙인 셈이다.
--- p.71
상황은 이렇다. 우리의 부모들은 이 세상을 파괴하는 일에 고용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재건하는 데 우리가 동원되려는 마당이다. 더욱이 그 재건 작업은 실제적인 이득을 발생시켜야 한다. … 우리는 새로운 녹색자본주의의 차가운 미소를 느낄 수 있다. 그래, 바로 그거다! 생태학이야말로 녹색자본주의 아닌가! 대안적 해결책 역시 그거다! 지구를 구한다는 것도 결국 그거였다! … 이는 곧 환경이야말로 인류 앞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세계적 문제가 되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다는 뜻이다. 아울러 세계적 문제라 함은 ‘글로벌’하게 조직된 자들만이 그 해결책을 갖출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 자들이 누구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다. 거의 1세기 전부터 재앙의 선두 진영을 담당해오던 집단들, 그저 로고 하나 살짝 바꾸는 최소한의 미봉책만으로 현재 상태를 고수하려는 자들 말이다. … 완전히 어리벙벙해진 우리는 지금의 파탄을 주도했던 자들의 품으로 여차하면 뛰어들 태세다. 바로 그 파탄으로부터 그들이 우리를 꺼내주길 바라면서.
--- pp.73-76
자, 보다시피 우리는 각자 등에 주검을 한 구씩 짊어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그 짐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문명의 종말, 그 임상적 사망 상태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것은 하나의 사실일 뿐인데,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결단으로 구체화시켜야 한다. 사실들은 흐지부지 덮어버릴 수 있지만, 결단이란 애당초 정치적인 것이다. 문명의 죽음을 결정하고 그 구체적인 방법을 다루는 것. 오로지 결단만이 우리 등에서 주검의 짐을 내려놓게 해줄 것이다.
--- p.92
모든 합법의 틀이 완전히 파괴된 것에 대해 합법적인 이의 제기를 하는 것은 이미 쓸데없는 짓이다. 이런저런 시민단체나 극좌파의 막다른 처지에 동참할 필요도 없다. 현 질서에 반기를 든다고 자처하는 모든 기존 조직들은 국가 체제의 언어와 관습, 그 형식을 그대로 빼다 박은 축소판 꼭두각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뭔가 다르게 정치를 해보겠다’는 모든 의지는 오늘날 국가가 장착한 의족을 어중간하게 늘여놓은 결과밖에 내놓지 못한다.
--- p.95
지극히 고립되고, 지극히 허약한 곳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반란의 모든 과정은 처음부터 새롭게 이룩되어야 한다. 지금 현재, 반란보다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무엇도 반란보다 더 절실하지는 않다.
--- p.96
사실 구체적인 조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유연한 뢱조와 떠도는 험담, 무형의 서열이 특징인 각종 패거리 문화들이다. 그것들은 어느 것이나 진실에 대한 물타기 작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모든 패거리 문화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 p.101
혁명의 움직임은 전염이 아닌 공명현상에 의해 퍼져나가는 법이다. 이곳에서 형성된 무언가는 저곳에서 형성된 무언가의 충격파에 대한 공명이다. 반란이라는 것은 페스트나 산불이 번지는 것처럼 일어나는 게 아니다. 그런 것들은 최초의 불씨를 기점으로 해서 차츰차츰 선조적 과정을 밟아 이루어진다. 하지만 반란은 마치 음악처럼 구체화되는 무엇이다. 그 핵심은 공간과 시간 속으로 제아무리 흩어져나가도 결코 자신만의 리듬과 진동을 잃지 않는다.
--- p.144
더 이상 파국을 예견하고, 그로 인하여 달가워 할 잠재적 결과들을 따져볼 때가 아니다. 그 시기가 언제이든 우리는 파국에 대비해야 한다. 봉기를 어떤 식으로 추진할지 그 세부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반란의 가치에 모든 가능성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 p.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