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서울의 상징 ‘숭례문’
숭례문은 태조 4년(1395) 시공해 3년에 걸쳐 완성됐다. 서울에 남아 있는 최고(最古) 목조 건축물로 역사성과 상징성 덕분에 1962년 12월 20일 국보 1호로 지정됐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화마에도 불타지 않아 고려 말·조선 초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소되기 이전의 숭례문은 세종 29년(1447), 성종 10년(1479)에 고쳐 지은 것으로 크고 작은 개축을 거치며 600여년의 세파를 견뎠다. 숭례문은 돌을 쌓은 석축 한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의 누각을 올린 2층 건물이다. - 기사원문: 2008. 2. 11 [세계일보]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의 친필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다른문과는 달리 세로로 쓰인 것이 특징이다. 현판이 세로로 쓰인데는 숭례의'禮(예)'자가 火(화)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이를 세워씀으로써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으려 했다는 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60년에는 오랫동안 보수를 하지 않아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샜고 밤이 되면 거지들의 유흥장이 되기도 했다. 1970년에는 남대문 부근의 차량이 증가하여 배기가스가 급증하였다. 이로 인해 단청이 변색, 원색을 잃어갔다. 2008년, 지금까지 많은 수난을 겪고도 600년을 지켜온 우리의 자존심인 국보 문화재가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남,남,남대문을 열어라!
우리가 어릴 적 즐겨 불렀던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다. “동 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 남 남대문을 열어라. 열 두 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 그런데 정말 동대문과 남대문은 12시가 되면 문을 닫았을까? 조선 시대의 한양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벽의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사대문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한양을 오갈 수 있도록 했다. 한양 도성 안에는 왕과 그의 가족들이 사는 궁궐과 나라의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관청이 있어서 밤낮으로 수문장(문을 지키는 장수)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사대문이 12시에 닫히지는 않았다. 새벽 4시쯤 문이 열렸다가 밤 10시쯤 닫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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