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간을 창조하고 생명을 불어넣은 창조주의 뜻이라면, 자살 역시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만약 자살이 신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것 역시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그 사람이 죽는 것 또한 신의 뜻이었을 테니 말이다.
영화<일곱 가지 유혹>은 인간의 이런 심리를 유머러스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이 악마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당신은 왜 신에게 반항을 한 거죠?” 악마가 대답한다. “그 이유를 말해주지. 나는 여기 앉아 있고, 당신은 이제 내 주위를 돌며 춤을 추면서 이렇게 말 할꺼야. ”오, 신이시여. 당신은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답나이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이렇게 불평하게
그는 “죽음에 대한 예상이 암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루크레티우스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우울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믿는다. 왜? 죽고 나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탈 이론이 설명하는 것처럼, 살아있다면 누릴 수 있는 삶의 모든 축복들을 죽고
그래도 나는 그런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죽고 나서 내 몸이 부활하거나 내 인격이 이식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이 나의 진정한 종말이라 생각한다. 죽음은 나의 끝이자 내 인격의 끝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
사실 나는 심미아스의 비유를 무척 흥미로운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에 대한 물리주의자들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개념이라고도 생각한다. 이 비유는 제대로 조율된 악기가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제대로 조율된 육체가 훌륭한 영혼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이는 물리주의자들이 인간의 정신을 설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물리주의의 관점에서 정신에 대한
예를 들어“생물학적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육체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엔도르핀이 과도하게 분비되고, 이 때문에 희열의 느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시신경이 특별한 방식으로 반응함으로써 터널과 눈부신 빛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설명할수 있다.
“사후의 삶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이자 심오한 철학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질문은“착각”에 불과하다. 조금만 더 진지하게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해본다면 누구라도 그 대답이 “아니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죽은 다음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모순이다. 삶이 끝난 상태에서 삶이 존재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