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망명 생활에 들어가 국적을 잃고 난민이 된 츠바이크가 쓴 감상이다. 여행 때마다 하는 신고, 외국환 증명, 국경 통과, 체재 허가, 해외여행 허가, 체재 신고, 퇴거 신고 등의 법적 수속을 수년간 얼마나 많이 해왔는가. 얼마나 많은 영사관과 관청의 대기실에 서왔는가. 친절한 사람, 불친절한 사람, 지루해 보이는 사람, 엄청나게 바쁜 사람 등 얼마나 많은 공무원 앞에 앉아왔
나는 카라얀이 지휘하는 연주가 들려주는 처절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다. 그 수준에 필적하는 연주를 이제 거의 들을 수 없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그러기에 카라얀 광장이라는 안이한 이름에 위화감을 넘어 위기감까지도 금할 수 없다. 슈트라우스의 예술, 그리고 카라얀의 예술을 사랑하면서도 그들의 '예술적 에고이즘'이 앞으로도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명
한때는 '평등한 국민'이라는 구호로 기대를 불어넣으며 동화를 권하더니, 다음 순간 그 기대감을 무지르고 '유대인'이라는 틀 속에 가둬 넣으려는 폭력, 그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폭력의 표상을 그는 여기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절체절명의 벽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마지막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
'나는 재일조선인'이라고 나서는 사람만이 재일조선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늘 자신은 누구인가 자문하는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다. 재일조선인이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온갖 식민주의적 관계를 고려하면 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포함한 전체야말로 재일조선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재일조선인이 일상에서 느끼는 부조리한 경험을 자학적인 농담으로 표현하는 데 무척 능란한 지인이 있다. 그것을 두고 나는 농담으로 '재일조선인의 유대식 조크'라고 부른다. 농담의 주제는 많은 경우 재일조선인의 실상에 대한 일본인 다수자의 무지와 몰이해다. 그러나 그런 그의 농담들은 다수자를 비웃기보다 사소한 것에 상처받고 마는 자신의 허약함을 자조하는 익살로 마무리되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내가 사로잡혀 있는 것은 '식민주의'의 ' '계통적인 부정' 때문이다. 그것은 나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즉 식민주의에 의해 디아스포라가 된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재일조선인은 세계적인 견지에서 볼 때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며 나는 혼자가 아닌 것이다. 비록 세계 여기저기에서 디아스포라로서 살고 있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이 아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이 세계에 절망한 사람들,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절망의 끝에서 극단적인 저항의 수단을 택하고, 그에 대한 가차 없는 진압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다.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면, 아무리 곤란해 보여도 그 길의 앞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