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시간에 관한 소설이다. 과거의 미련과 미래의 불안으 로 현재를 잃어 가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지금, 이 순간을 보라색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 안에는 과거인 붉은색과 미래인 푸른색이 적절하게 섞여 있다. 우리는 오롯이 현재만을 살아간다고 믿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또 인간의 삶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더는 어쩔 수 없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아, 완벽히 대비할 수도 없는
"나우야."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멀리서 하제가 뛰어오고 있었다. 열다섯 동그란 얼굴의 그녀가, 열아홉 힘없이 무너져 내린 그녀가, 서른둘 누구보다 지금을 사랑하는 그녀가 나우를 향해 손을 흔 들었다. 다시 뒤돌아본 화단에는 검은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나우가 빙긋이 웃고는 하제를 향해 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 잔의 칵테일이 사람 사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서." 무수히 많은 사람만큼, 모두 다른 인생만큼, 칵테일의 종류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제의 시선이 강에 흩어진 빛으로 돌아섰다. 칠흑의 밤이 지 나면 태양이 떠오르겠지. 아름답게만 보이던 세상도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 줄 것이다. 별이 지고 해가 뜨듯 칵테일 한 잔에 쓰 고 단 맛이 공존하듯, 인간의 시간
하제와의 첫 만남이 내가 된다면 세 사람의 운명은 달라질까? 이내의 죽음을 막는다면 그녀의 삶은 달라질까? 나우는 모든 순간순간이 두려웠다. 언젠가 하제가 사라질까. 이토록 편안한 만 남이 지루함으로 변할까. 뒤늦게 그녀에게 다른 운명의 상대가 찾아올까. 그렇게 미련 없이 뒤돌아설까 두렵고 무서웠다. 할 수 만 있다면 열다섯 소년처럼 조르고 싶었다. 어떻게든 하제를 붙 잡
신은 인간에게 미래를 준비할 혜안을 빼앗는 대 신, 그 미래가 현실로 닥쳤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버텨 낼 힘을 주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나우는 깨달았다. 그러 니 머지않은 미래에 상상하지 못한 시련이 온다 해도, 그때의 자 신은 어떻게든 그 어려움을 이겨 낼 것이다. 나름의 방식대로 헤 쳐 나갈 것이다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과 행복, 감사와 평안, 아 니면 불안과 우울, 좌절과 비통, 생각의 조명이 어디를 비추느냐에 따라 유독 그 부분이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겠죠." "지나간 시간을 넣고." .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살짝 첨가한 다음에······." 그가 은빛 스푼으로 천천히 두 음료를 섞었다. 그러고는 한입 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 마셔 버리면, 남는 건 무엇일까요
"이 칵테일은 이름이 뭐지?" 바텐더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뱉었다. "옐로 튤립(Yellow Tulip)입니다. 노란색은 밝고 따뜻한 느낌을 주지만, 유독 노란색 튤립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하여 연인들끼리는 가급적 노란 튤립을 선물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계속해 보라는 듯 나우가 눈짓했다. "노란 튤립의 꽃말은 허무한 사랑, 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