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시각과 시각 사이의 흐름이라고 억지로 말하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말로부터 소외되지만, 허송세월하는 저녁에 노을을 들어다보면 나는 시간의 질감을 내 살아 있는 육신의 관능으로 느낄 수 있고, 한개의 미립자처럼 또는 한 줄기 파장처럼 시간의 흐름위에 떠서 흘러가는 내 생명을 느낄 수 있다.
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햇볕은 신생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의 볕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
주어와 술어를 논리적으로 말쑥하게 연결해 놓았다고 해서 문장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주어와 술어 사이의 거리는 불화로 긴장되어 있다. 이 아득한 거리가 보이면 늙은 것이다. 이 사이를 삶의 전압으로 채워 넣지 않고 말을 징검다리 삼아 다른 말로 건너가려다가는 허당에 빠진다. 이 허당은 깊어서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허당에 자주 빠지는 자는 허당의 깊이를 모른다. 말은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 있다. 무한 공간을 날아온 이 정보는 발신과 수신사이에 시차가 없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사물화 되어 있고 사물화된 만큼 허구로 느껴지지만 죽음은 확실히 배달되어 있고,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개좌도 찍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