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왕생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듯 기독교 신앙의 본령도 ‘사후세계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의 변화와 거듭남”, 즉, ‘중생(重生)’이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바울의 기독론에 심각한 회의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울이 이단인지 삼단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말처럼 한때 예수를 핍박했던 사
그나저나 죽을 권리가 정말 나에게 있는 것인지 그것이 알고 싶다. 오늘 명동에서 존엄사를 다룬 영화 ‘다 잘된 거야’를 도반들과 함께 관람했다. 존엄사를 두고 “인간의 마지막 권리”라는 주장과 함께 “천명을 거부하는 인간의 욕망이다”라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국가가 허용하는 적정선의 연령을 두고서도 각양의 이론이 교차하였지만, 안락사 문제를 다루었던 인도 영화 ‘청원
우리는 지금 개혁의 완성을 이루어 낼 태평성대의 세종과 같은 리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친일 청산의 원죄가 해결되지 않은 미완의 시대에 한 가닥 개혁의 불씨를 살려낼 희생의 리더십을 원하는 것이다. 청와대를 죽을 자리로 여기겠다는 결기와 함께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한 알의 밀알로 삼아 개혁의 불을 지펴줄 그런 ‘불씨’가 필요하다. 개혁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
아직도 문재인 대통령은 잘못이 없고 ‘낙엽 일파’와 민주당만의 잘못이라고 하는 ‘대깨문’들은 여전히 그를 비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에게서 박정희를 숭배하는 태극기 부대의 환영이 어른거린다. 참모진은 참모로서의 실무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을 지면 되지만, 대통령은 리더로서 관리책임(accountability)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그들에
자고로 때를 놓친 봉황은 닭보다 못한 법이다.[去時鳳凰不如鷄] 고스톱 칠 때 제일 불쌍한 사람이 돈 다 잃고 나서 집에 가지 않고 선수들 뒷전에 앉아 “비 먹어”, “똥 쌍피 먹어” 하고 훈수 두는 인간이다. 행여 개평이나 좀 얻어볼까 하는 철없는 짓거리다. 모자란 철수 씨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도리도리’의 인상을 보시오. 개평 주게 생겼나?‘안철수’의 파란만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꽃이 없듯 마지못해 살아있는 꽃은 없다” 아무렇게나 태어난 인생이 없듯 마지못해 살아가는 인생도 없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 땅 지구에 딱 한 번 초대된 신성 불멸의 존재이다. 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저마다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신은 공평하다.
“새는 갇혀 있어도 날 것을 잊지 않고, 말은 매여 있어도 항상 달릴 것을 생각한다”라는 이 두 구절은 내 인생의 결정적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간혹 귀인을 만나 내가 쓴 책을 선물할 때면 종종 이 구절을 초서로 써드리곤 하는데, 이는 나의 초발심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과 상대에게도 그날의 감동을 전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다.鳥囚不忘飛 - 조수불망비 馬繫常念馳 - 마계상념치 7
누군가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라고 하니 무슨 사과를 그따위로 하느냐며, 요즘 학생들은 조소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 한자를 배우지 않은 학생 입장에서는 ‘심심하다’라고 하는 말이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의미로 느꼈을 것이니, 진정성 있는 사죄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한자어의 심심(甚深)이란 앞의 ‘심(甚)’은 ‘매우’, ‘몹시’라
이미 이천오백 년 전에 공자는 ‘노장(老莊)’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조수불가여동군(鳥獸不可與同群)’이라 하였다. 사람은 새와 짐승과 더불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말이다. 사회의 유기적 기능은 ‘무위(無爲)’를 통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유위(有爲)’의 인위적 노력의 결과물로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나는 동서양의
손바닥에 ‘왕’ 자를 새겨 국민을 잠시 속일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손바닥으로 하늘을 영원히 가릴 수는 없다. 진솔한 사과와 반성만이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다. 아울러 유약한 민주당 ‘생계형 전치인’들에게 권한다. 국정감사장에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에게 감히”라며 눈을 부라리고 호통을 그 기개는 어디 가고 나라 밖에 있는 대통령에게 ‘이 새끼’ 소리를 듣고도 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