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저작권이 만료되어 이미 여러 판본의 번역이 나와 있는 책을 번역할 때나, 나 이전에 다른 사람이 번역한 적이 있는 책을 재번역할 때는 경쟁심과 초조함에 시달린다. 내가 저자의 속마음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기를, 내가 더 간절히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 이전에 이 텍스트를 차지했던 사람에게 알 수 없는 질투심을 느끼고 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번역을 내놓
그럼에도 번역을 하는 이유는 사랑이라고 해두자. 단테에 푹 빠져서 단테 번역에 여생을 바친 도러시 세이어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 사랑은 소유욕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내가 좋아하는 책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내 이름을 단 책으로 내려는, 호프스태터처럼 그 텍스트와 ‘결혼’하려는 행위다.
번역은 탑이고, 배신이고, 교환이고, 광기이자 광기의 치료제이고, 길들이기이자 낯설게 하기이고, 조각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자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고, 빵이자 결핍이고, 틈새이고, 메아리이고, 거울이고, 다시 탑이다. 비유를 통하지 않고는 정의할 수 없는 번역은 흰 고래다.
이런 생각 때문에 단테는 라틴어를 버리고 이탈리아어로 필생의 역작을 썼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시도였다. 프루 쇼는 이 선택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단테의 “이탈리아어 작품은 그가 라틴어로 쓴 어떤 것보다 더 생동감 있고 표현력 있고, 더 본능적이며 더 다양하고 독창적이었다. […] 만약 라틴어로 썼다면 똑같은 에너지와 힘, 경이로울 만큼 풍부한 말재간을 발휘할
인공지능 번역 엔진은 현대의 바벨탑이다. 번역 엔진은 하나의 통합 언어를 향해, 다시 바벨탑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분투한다. 자동 번역 엔진은 이제 번역가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될 것이고, 웹상에서, 일상에서 언어 간 경계가 사라질 것이고, 언어는 결국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살아 있는 풍부하고 섬세한 언어 없이 문화가 발전할 수 있을까. 흐릿하고 개성 없는 공용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섬밀하고 정교한 언어의 세계가 있다. 단테가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속어가 아니라 공용어이지만 죽은 언어인 라틴어로 글을 썼다면 『신곡』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번역이든 창작이든 우리가 쓰는 글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더 평범해지는 쪽이 아니라 더
인공지능에 의식이 없다는 걸 아는데도, 텍스트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흉내를 내는 것뿐임을 아는데도, 챗GPT가 마치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맥락을 파악하면서 글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1과 0밖에 모르는 녀석이 사람과 똑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이제 번역가가 필요 없어지는 날이 곧 올 것 같았다. 거울 앞에 서기가 두려운 날이 오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