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답하지 않았지만 가을은 가슴이 벅찰 만큼 가득 찬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자라지 못해 여전히 어린 친구도 내년 에는 이들로 인해 어른이 될지도 몰랐다. 가을은, 자신이 없던 어느 밤에 어린 봄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건 자신이 곁에 있어 줬더라면 봄에게 기회가 있 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었으며, 친구를 떠나보내고 마음 껏 울지 못한 그리움이었다. 밤은 어두
"봄이가 집에 가기 싫다고 그랬는데······ 무서웠어. 나 때문에 봄이가 그렇게 됐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할까 봐. 너도 내 탓을 할까 봐. 말할 수가 없었어."웃는 표정 한 번이면 행복한 척을 할 수 있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잊은 척 굴 수 있으며, 그저 하루를 버티면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니. 그렇게 간단하게 사람이 사람을 속일 수 있다니. 고작 그런 것들에 가려 소중한 사람의
엄마는 딸이 얼마나 자랐는지 눈으로 보면서도 늘 철렁했다. 친구가 왜 죽었냐고 묻던 딸을, 울먹이던 딸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절대로 말하지 않았을 사실들을 말해 버린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할 터였다. "엄마. 정말로······ 나만 괜찮으면 돼?" "응. 엄마는 그거면 돼." 엄마는 매몰차다 싶을 만큼 차갑게 답했다. "친구가 아파도, 무슨 일이 생겨도
열아홉이 된다는 건 단순히 십 대의 마지막을 보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수능을 치든 알바를 하든 무엇을 하든 모든 열 아홉은 똑같은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어른이 되기 전 마지막 시기를. "봄아. 넌 어떤 어른이 되어 가고 있어?" "......" "난 잘 모르겠어. 어릴 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이게 뭐야, 아무것도 안 하고 이렇게 가만히 있기만 해도 어른이 된 다는 게 말이 돼?
살아가는 일은 고된 일이라, 지난 일을 잊고 또 잊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쉽사리 잊었다. 자신들 은 이미 잊었으니 아이들은 더 빨리 잊을 거라 생각하면서. 애 들이 뭘 아느냐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대면서. 그들은 아이들이 때로 잊은 것이 아니라 잊은 척한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한다는 걸 기억하지 못했다.
"공부는 잘돼 가?" "존나 빡시지 뭐. 너는?" "어?" "별일······ 없어?" 있어. 무서워. 나한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가을은 말을 꺼내 볼까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 지 않았다. 혹시라도 유경이 바쁘다고 하면, 듣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듣고 있는 거면 어쩌지? 예전에도 유경은 가을의 쫑알거림이 더는 궁금하지 않다는 듯 휴대폰만 들여다본 적이 있
유경은 책상 밑에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잠든 듯 눈을 감고 있었지만 사실 유경은 잠든 게 아니었다. 유경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째깍째깍. 초침이 흐르는 소리가 의식되기 시작하고, 초침 소리가 마치 고함 소리처럼 크게 들려오기 시작할 때쯤, 끼이익 방문이 열리고 유경의 머릿속으로 작은 아이가 찾아왔다. 작은 발소리는 방 안을 맴돌았다. 타닥타닥 뛰
별일 없을 거라고 다독이던 아빠였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병원에서 딸을 마주했을 때, 사고 현장에 있던 딸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아빠는 하늘에 대고 몇 번 이나 고맙다고 절을 했는지 몰랐다. 가을의 아빠는 자식이 아프면 자신이 뭔가를 잘못해서라며 스스로를 탓했고, 자식이 무언가를 해내면 해 준 것도 없는데 잘 자라 주었다며 자식에게 공을 돌리는 사람이었다.
남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 중 몇은 진심으로 걱정을 했고, 다른 몇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난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내가 낫지, 하고 위안을 삼았다. 제 자식 일이 아니라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사람들과 제 자식 일처럼 아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오고 갔다. "아니지. 애기 동자가 용한 게 아니라 틀린 거 아닌가. 가을이는 멀쩡하다던데." "가을이 멀쩡
반면 가을은 매일이 불안했다.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 삶에 내던져 버린 것만 같았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가을에게 사람들은 자 이제 목표를 향해 달려, 하고 신호를 주었다. 총소리가 울렸는데도 왜 달리지 않느냐고 다그치면서. 하지만 둥그런 원 안에서 어느 방향으로 달려야 목표 지점이 나오는지, 가을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