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우리는 적어도 한 번은 모든 판단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무의식의 표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대로, 도덕심이나 의협심, 근사한 겉모습을 모조리 떨쳐버리고, 우리의 충동과 욕구, 불안,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그런 원점 상태에서 비로소 우리는 다시 실제의 삶을 위해 가치관을 세우고, 긍정과 부정,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자식이 내 앞에서 죽거나 죽어가는 것 같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감정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눈과 이마가 있고 작은 손과 목소리가 있는 육신의 자식이었다. 또한 그들은 나의 정신적 자식이자 재산이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떠나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상과 시였다. 그들은 나의 예술이었고 생각이었고 시력이었고 삶이었다. 그들은
“네가 고통스러운 까닭은 고통을 겁내기 때문이다. 네가 아픈 까닭은 고통을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도망치지 말고, 탓하지 말고, 겁내지 마라. 고통을 사랑하라. 너는 이미 스스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유일한 마법, 단 하나의 힘, 구원과 행복이 마음속에 있고, 그것의 이름이 사랑이라는 것을 너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고통을 사랑하라! 거부하지 말고 도망치
가을에 마지막 남은 잎사귀를 떨구는 나무의 모습이 그랬을 것이다. 얼음과 불길 속에서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 오래전 태고의 땅이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고통이고 아픔이며 깊은 슬픔이었다. 그러나 반항이나 반발은 아니었다. 그것은 동의, 희생, 경청이었고,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며 함께하려는 마음이었다. 거룩한 성인은 자신을 스스로 희생했고, 희생을 찬양했다. 그는
인내는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고행이다. 인내는 가장 힘든 일이면서 동시에 배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다. 모든 자연, 모든 성장, 모든 평화, 모든 번영,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인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내는 시간과 침묵과 신뢰를 요구한다. 또한 인내에는 일생보다 훨씬 더 긴 시간에 대한 믿음, 개인의 통찰로 깨달을 수 없는 연관성에 대한 믿음도 필요하다. ‘인내’와
명랑함은 장난이나 자만심이 아니다. 그것은 최고의 인식이자 사랑이며, 모든 현실을 긍정하고 모든 나락과 심연의 난간에서 깨어 있는 것이다. 명랑함은 거룩한 성인과 용맹한 기사의 미덕이고 방해할 수 없으며, 나이가 들어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난다. 명랑함은 아름다움의 비결이며 모든 예술의 진짜 본질이다.
마법의 사슬로 우리를 옭아매는 동양 예술의 배경에는 바로 동양적인 느림의 미학이 있다. 말하자면 예술로 승화된 여유가 있다. 아라비아의 이야기꾼들은 가장 긴장되는 부분에서 일부러 시간을 끌며, 궁전의 화려한 장식, 보석을 달아 예쁘게 꾸민 말안장, 수도승의 덕망, 진정한 현인의 완벽함을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왕자나 공주가 결정적인 말 한마디를 하기
한 뼘의 하늘, 정원의 초록 나무 울타리, 튼튼한 말, 멋진 개, 삼삼오오 떼 지어 가는 아이들, 아름답게 감아올린 여인의 머리. 그 모든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눈을 떠 자연을 볼 줄 아는 사람은 거리를 걸어가면서 단 1분도 허비하지 않고 소중한 것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도 눈은 절대로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맑아지고 더 좋아진다. 설령 흥미 없게 보이거나 흉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