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 진열대에 줄지어 놓인 화려한 병들 가운데, 내가 진심으로 마음에 드는 향수를 하나 사자. 설령 누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해도, 내가 좋아하니까, 하고 자신있게 계속 뿌릴 수 있는 향수를 하나, 그리고 그것을 뿌리며 살아갈 내 인생을 하나, 손에 넣고 싶다고, 점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내민 티슈조차 받지 않은 채, 진열대 조명에 비쳐 색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향수들
첫 향은 달콤하고 신선하며 화려한 꽃들이 한데 모인 듯한 플로럴한 향이 나는데, 잔향에는 샌달우드가 스며든 머스크가 온은히 감도는 그 향수를 뿌린 나는 행복했을까. 분명, 무척 행복했다. 행복했을 터인데, 어째서 행복했는지 어땠는지를 이렇게도 끝없이 되묻게 되는 걸까.P.188 중에서 #리딩스타트
나도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저 성가신 존재라고만 생각했어요. 고집 세고 융통성 없고, 트집이나 잡는 여자라고만 여겼어요. 하지만 아니더라고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건 우리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우리 여성들 사이에서도, 체념에서 굳어진 방식을 서로에게 떠넘겨 온 거예요. 그 무심한 한마디에 다 드러나요. 우리를 깔보고 있고, 줄곧 그렇게 깔보고 싶어 한다는 게요.
무서우시죠? 기존의 여성상에 없던 사람이. 비위를 맞추지 않는 존재가. 그야 편하겠죠. 당신들 앞에서 바보인 척, 모르는 척해주면 안심이 될 테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나나, 우리가 그런 짓을 해야만 하나요? 요즘 여성 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면 시끄러워진다며, 마치 사회와 여성에 정통한 척하지만, 겉치레일 뿐, 건드리면 곪아 터지는 종기처럼 성가신 존재라고 배척하는 데
웃기지 않은 농담에도 적당히 웃어주고, 불편한 질문은 애교 섞인 태도로 얼버무리며, 상처 주는 말을 들어도 마치 상처 받지 않은듯 넘어가면, 그들에게는 '편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요령이라고 여겼다. 포기와 영합은 결국 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아가가 위한 지혜이자 요령이었다.P.169 중에서 #리딩스타트
남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도, 여성 사원 외모를 두고 하는 농담도, 설령 그 화살이 자기에게 향하더라도 대충 웃어넘기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정도쯤은 흘려보내면 될 텐데, 왜 그러지 않는 걸까. 무슨 고집일까. 조금 더 유연하게 살면 될 텐데, 하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P.169 중에서 #리딩스타트
십자가를 짊어지는 게 죄의 대가라면, 이것이 십자가라면 조금은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더러운 비밀을 안고 산다는 건 다듬어지지 않은 돌덩이가 가슴 언저리에 달라붙어 몸과 하나가 되어가다, 날이 갈수록 일그러지며 단단한 암석이 되어 몸속에 둥지를 트는 것 같았다.P.152 중에서 #리딩스타트
머리를 숙인 내가 옳은지는 모르겠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테이블 위에 억지로 끌려온 듯 놓여 있는 이 종잇조각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이 될지 어떨지 모른다. 유치하고, 인내심 없고 끈기 없는 내게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가지가 불확실했다. 하지만 언제나 자기만 옳다는 그의 곁에, 더는 있을 수 없다는 마음만은 확실했다. P.133 중에서 #리딩스타트
그는 늘 옳다. 언제나 그의 말이 맞다. 어쩌면 이번에도 내가 잘못한 걸지 모른다. 아니, 그는 늘 나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정말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그와 헤어질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옳은 선택일 것이다.P.132 중에서 #리딩스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