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가 실재했는지 와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행위가 적법한 그 위법인지 이 세 가지는 한몸을 이루지 않고 각기 다르게 움직이며 겹치기도 하고 비껴가기도 하는 것 같다.지난 몇 년 동안 특히 2025년에 저 세 가지가 서로 충돌하는 서건들을 많이 목격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언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다.
추도예배에서는 어떤 기도를 해야 하지? 죽은 사람을 위해 기 도해야 하나? 하지만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백부의 공장에서 일하다 죽은 스무 살 청년. 이삭 오빠가 들이받은 차에 타고 있던 아이. 그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잊힐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테니까. 지저분한 것은 모두 편집해내듯이. 이삭 오빠와 백모, 백부의 찬란하게 빛나는 이미지를 위해서 아무것도 문제될 것은
그동안 한국문학이 소중하게 보듬어왔던 '돌봄'과 '생태'라는 두 개의 키워드가 상상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교차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설이 반복해 서 되뇌는 지극한 고마움 속에서 또하나의 새로운 윤리가 탄생 한다. 무척이나 고마울 것 그것이 여정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마지막 윤리이다
형의 죽음(「더블」)2) , 친구의 죽음(「현관 수국 뒤에 있다」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엄마의 죽음(「영원 없이」 「외출」 「럭키 클로버」) 삼촌의 죽음(「서울 오아시스」), 죽음(「빛 가운데 걷기」), 그리고 나의 죽음(「쓸 수 있는 대답」)3) 끝내 말해질 수 없는 누군가의 죽음은 소설 한가운데에 공백처럼 놓여 있었고, 남겨진 인물들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그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