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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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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드 앗 딘은 이 급격한 변화의 중요성을 완전 히 이해하고 칭기스 칸을 "세계 정복 군주 (padishah jahan-satan)"라고 부르며, 그의 권력 장악이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페르시아 역사가 무함마드 샤 반카라이도 일 칸국 말기에 쓴 글을 통해, 이란이나 중국의 어떤 황제도, 그 어떤 인도 통치자나 술탄, 카이사르, 칼리프, 라자, 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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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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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탄 출신의 인도 난민이며 몽골에 지독히 적대적이었던 주즈 자니도 그들에게 "하늘의 명령 (qaza-i asmani) la 있으며 - 하늘의 명령과 신성한 운명의 지시에 의해 세계 지배권이(jahanbani)ol 이란과 투란(Turan)의 통치자들로부터 칭기 칸과 그의 후손들에게로 갔다" 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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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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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한 가지 경우는 그러한 지지 표명이 의심할 여지없이 진심이었는데, 무슬림 다수 지역인 일 칸국에서 기독교 성직자들이 보인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홀레구(재위 1256~1265)부터 울제 이투(재위 1304~1316)에 이르기까지 이란의 몽골 조정은 동방 기독교의 성직자 계층에게 임명장을 발급하고, 면세 특권과 건축 자금을 주었으며, 공공 의식에서 그들을 예우했다. 이 대가로 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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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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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어디에 있든, 몽골 제국과 그 유산에 대한 정확하고 균형 잡힌 평가를 위해서는 그들이 통치한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제국적 제도에 대한 연구는 필수불가결하다. 앞에서 우리는 제국적 제도의 중요한 특징 중 일부만을 다루었지만, 우리가 가진 지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들에 대한 설명이 몽골 지배의 중요한 측면을 설명하고 제국적 제도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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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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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는 제국 전역에 걸쳐 신속하고 광범위한 운송 및 통신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차가다이와 바투에게 각자의 역참을 설치하고 상호 연결하여 사신들이 여행하고 제국의 모든 구석이 이어지게 하라고 촉구했다. 우구데이는 역참의설립을 자신의 4대 업적 중 하나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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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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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가의 역할은 민간 업무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탐마치는 관리의 직함이 아니라 일종의 군대를 지칭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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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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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이 금과 호레즘 원정 중에 임명한 다루가의 사례를 통해 이들이 제국 초기에 담당한 직무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첫째, 다루가는 정복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배치됐다. 둘째, 각 도시에 하나 또는 복수의 다루가를 임명했는데, 투샤 바스칵처럼 여러 도시 를 포괄하는 넓은 지역에 지위가 더 높은 다루가를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셋째, 북중국의 포병 부대나 부하라의 부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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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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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고려 왕들도 몽골의 케식 제도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충렬왕은 1274년 즉위 직후 자신과 몽골 생활을 함께한 귀족 가문 자제들인 투르칵, 즉 주간 호위대를 몇 개로 나누고, 이들을 야간 호위대로 삼아 코르치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네 부대로 조직했다가 1275년에 세 부대로 변경했다. 동시에 고려 궁정에 비 체치(bichechi), 투크치(tuqchi, 기수), 바우르치(ba'ur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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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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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통치자들은 보통 오르도 텐트 중 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 날 아침 그곳에서 정무를 처리했다. 이런 의미에서 오르도는 그들의 거주지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중심이었고 대신들과 장군들을 만나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는 곳이었다. 많은 문서들이 회의 때 천막 안에 누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데, 군주와 그의 아내 외에도, 일반적으로 케식 부대의 장들, 상주문을 가져온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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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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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안과 제왕들이 계절별 숙영지 사이를 이동할 때면, 많은 원, 가축, 천막, 수레가 함께 이동했다. 이 거대한 텐트 복합체를 르도(ordo) 또는 오르두(ordu) 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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