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드 앗 딘은 이 급격한 변화의 중요성을 완전 히 이해하고 칭기스 칸을 "세계 정복 군주 (padishah jahan-satan)"라고 부르며, 그의 권력 장악이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페르시아 역사가 무함마드 샤 반카라이도 일 칸국 말기에 쓴 글을 통해, 이란이나 중국의 어떤 황제도, 그 어떤 인도 통치자나 술탄, 카이사르, 칼리프, 라자, 카간
키스탄 출신의 인도 난민이며 몽골에 지독히 적대적이었던 주즈 자니도 그들에게 "하늘의 명령 (qaza-i asmani) la 있으며 - 하늘의 명령과 신성한 운명의 지시에 의해 세계 지배권이(jahanbani)ol 이란과 투란(Turan)의 통치자들로부터 칭기 칸과 그의 후손들에게로 갔다" 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한 가지 경우는 그러한 지지 표명이 의심할 여지없이 진심이었는데, 무슬림 다수 지역인 일 칸국에서 기독교 성직자들이 보인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홀레구(재위 1256~1265)부터 울제 이투(재위 1304~1316)에 이르기까지 이란의 몽골 조정은 동방 기독교의 성직자 계층에게 임명장을 발급하고, 면세 특권과 건축 자금을 주었으며, 공공 의식에서 그들을 예우했다. 이 대가로 몽
진실이 어디에 있든, 몽골 제국과 그 유산에 대한 정확하고 균형 잡힌 평가를 위해서는 그들이 통치한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제국적 제도에 대한 연구는 필수불가결하다. 앞에서 우리는 제국적 제도의 중요한 특징 중 일부만을 다루었지만, 우리가 가진 지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들에 대한 설명이 몽골 지배의 중요한 측면을 설명하고 제국적 제도의 중
따라서 그는 제국 전역에 걸쳐 신속하고 광범위한 운송 및 통신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차가다이와 바투에게 각자의 역참을 설치하고 상호 연결하여 사신들이 여행하고 제국의 모든 구석이 이어지게 하라고 촉구했다. 우구데이는 역참의설립을 자신의 4대 업적 중 하나로 여겼다.
칭기스 칸이 금과 호레즘 원정 중에 임명한 다루가의 사례를 통해 이들이 제국 초기에 담당한 직무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첫째, 다루가는 정복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배치됐다. 둘째, 각 도시에 하나 또는 복수의 다루가를 임명했는데, 투샤 바스칵처럼 여러 도시 를 포괄하는 넓은 지역에 지위가 더 높은 다루가를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셋째, 북중국의 포병 부대나 부하라의 부유한
흥미로운 점은, 고려 왕들도 몽골의 케식 제도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충렬왕은 1274년 즉위 직후 자신과 몽골 생활을 함께한 귀족 가문 자제들인 투르칵, 즉 주간 호위대를 몇 개로 나누고, 이들을 야간 호위대로 삼아 코르치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네 부대로 조직했다가 1275년에 세 부대로 변경했다. 동시에 고려 궁정에 비 체치(bichechi), 투크치(tuqchi, 기수), 바우르치(ba'urchi
몽골 통치자들은 보통 오르도 텐트 중 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 날 아침 그곳에서 정무를 처리했다. 이런 의미에서 오르도는 그들의 거주지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중심이었고 대신들과 장군들을 만나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는 곳이었다. 많은 문서들이 회의 때 천막 안에 누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데, 군주와 그의 아내 외에도, 일반적으로 케식 부대의 장들, 상주문을 가져온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