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트라우마가 자식에게도 이어질까봐 두려워서든, 부모가 된다는 생각 자체에 끌 리지 않아서든 자식을 갖지 않기로 했다면, 이는 존경할 만한 결정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는 찾지 못했지만, 나는 아이 를 가질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상황이나 문화적 규범에 떠밀려 자식을 낳은 부모의 가정에서 많은 학대가 일어난다고 믿는다.
실제로 생존자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학대 경험이 없는 성인에 비해 피해자가 될 위험이 다섯 배 높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 형제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너무나 자주 어린 시절의 패턴을 반복한다. 이것은 특히 '현재 진행중인 상실'의 극단적인 형태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와 같은 환경에서 발생했기에, 그들을 끊어내는 것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고통에 완전히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을
그들이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것이든 그럴 수밖에 없었 던 것이든, 그들의 '최선'은 내가 받아본 것 중 최악이었다. 어린 시절에, 그리고 그후로도 그들의 최선은 변함없이 부적절했고, 재활을 거부하는 상습범을 비난하듯 나는 그들을 똑같이 비난한다. 도덕적 문제는 차치하고 치유적 관점에서 생존자는 치유를 시작하기 위해 학대자를 비난해야만 한다. 복합 PTSD에 대한 가장 효과
가족관계,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은- 우리가 그들의 재물을 빼앗거나 폭행을 저지르지 않는 한-우리가 아닌 부모의 잘못일 확률이 높다. 앞서 살펴보았듯 학대자는 가족관계란 다른 관계와 다르며 자녀로서 우리는 부모에게 평생 빚지고 있다는 거짓말로 생존자를 쥐고 흔든다. 그들은 우리가 부모-자식 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한 비대칭 구도로 인식하길 바라지 만
생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눈에 띄지 않고, 체중을 줄이고, 조직에 잘 적응하고, 직장을 구하면 된다는 믿음. 주디스 허먼은 이렇게 설명한다. "죄책감은 재앙에서 어떤 유용한 교훈을 이끌어내거나 권력과 통제에 대한 감각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무력한 상황을 마주 하는 것보다 더 견딜 만하다. "
우리는 학대자의 죽음을 슬퍼하진 않더라도 그의 삶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다른 슬픔을 품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인 반면, 우리 생존자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무언가를 애도하는 셈이다. 어떤 슬픔이 다른 슬픔보다 더 크다고 할 순 없지만, 우리의 슬픔은 형태가 없고 다루기 어렵기에 어떤 측면에서는 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