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마음을 잘 털어놓고, 새로 둥지를 틀 수 있는 관계를 많이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지탱하기 위해.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나무를 가꾸고 싶다고. 서로의 뿌리가 엉키도록. 혼자서 쓰러지지 않도록. 스스로 가꾼 숲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모든 기르는 일이 마음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언제든 뿌리가 잘리고 가지가 쳐내진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죽은
화내는 대신 슬픔에 익숙한 사람들. 찡그리기보다 조용히 무표정해지는 사람들. 지호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했다. 아주 약하게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만 사랑했다. 누워서 흘리는 눈물은 귓속에 고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슬픔이 거기에 고이는 걸 아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시간만큼만 그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 속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걸 아는 채로. 더
지우개가 지나가면 번지거나 옅어지거나 다시 환하게 흰색이 되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 애써 까맣게 칠해놓고 중요한 순간에는 하얗게 지워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재밌고 좋았다. 세상일이란 게 일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걸, 있게 했던 걸 없게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란 걸 미술 학원에서 처음 배운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