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은 무엇이 세상을 위하고 사람을 위하는 길인지, 그 가치관 자체가 쉽게 뒤집힙니다. 애초에 인류가 너무 많은 거 아니냐, 차라리 인구가 줄어드는 게 지구를 위하는 일 아니냐는 식으 로 '세상과 타인을 위해서'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하는 목소리조차 하나의 정답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니까요. 이렇게 모든 사상이 쉽게 반전될 수 있다면, 역설적으로 어 떤 한 가지를 끝까
즉, 어느 각도에서 봐도 틀림없이 본질적으로 옳은 답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어느 지점에서는 '이 시야에서, 어느 정도의 확률로, 틀릴 수도 있다'라는 각오를 다지고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가능한 한 본질적이고 싶은 나머지, 달리 말하면 누구에게도 공격받고 싶지 않 아서 시야를 넓히려고 시점을 자꾸 뒤로 빼다 보면, 어느 샌가 누구의 모습
"뭐랄까, 생명체로서 약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커뮤니케이션 같거든요. 서로 다 힘든 일이 있고,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는 게 기본값인 거죠. 매일 바쁘고 정말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일이다보니, 나 자신과 예전보다 훨씬 더 마주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어서 그런지 상대방도 힘든 점이 많겠구나, 하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게 돼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서로 도울 수 있고, 눈에
-떠오른 사람이 아르바이트 동료인 유리였다. 배운 게 많지 않고, 국제적인 이슈는 커녕 일본 뉴스조차 하나도 모르며, 외국인 손님에게 내가 간단한 영어로 응대만 해도 대단하다며 침이 마르게 칭찬해주는 사람. 내가 연락하는 사람 중 가장 시야가 좁을 것 같은 사람. 이곳에 오면 절대로 상처받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왜나하면 은근 얕보고 있으니까. 시야의 폭에서는 절대 나
머릿속만 분주할 뿐, 현실에서는 아무런 행동도 못 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쌓이지 않는다. 뭔가에 상처받거나, 자기혐오에 빠지거나, 속을 끓이거나, 초조해하기를 단편적으로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사 실은 유학생 애들처럼 해외로 뛰쳐나가는 행동력을 갖고 싶은데.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계정세나 사회 문제를 똑바로 마주하며 나만의 의견을 품고 살아가고 싶은데.
당시에는 유행하는 것들을 제 것인 양 손에 쥐고 휘두르는 그 아이들이 무서웠다. 주체성 없는 풍향계 같은 가벼움은, 언젠가 나를 혐오의 대상으로 겨냥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표리일체였다 그래. 풍향계 같은 거다. 최첨단 유행을 포착하는 심미안이 있는 게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을 파악해서 그 시점의 다수파에 속해 있지 않으면 불안해할 뿐인 풍향계.그러니 역시 '덕질'은 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