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곳이 아니다. 그 구분은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 사이에, 타인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 있다. 어떤 신자들은 홀로 족한 자들이며. 어떤 비신자들은 공감하는 자들이다. 타인은 지옥이다 라고 사르트르는 썼다.나는 마음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서양은 자유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개념에 사로잡혀 더이상 그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광적인 상태에 빠져 있다.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기 위해 자유롭겠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단절과 궁지와 공허 그 자체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내면적 해방의 가능성을 가져다줌으로써 이와 같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유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자유는 돛을 펼치기 위해 밧줄을 잡아당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배를 나아가게 할 수 없다. 바람이 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성령 인 바람에 불더라도 돛이 펴져 있지 않다면 그때도 배는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아가게 하기 위해 우리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거기다가 기수를 정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책
우리는 올바른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 그 신앙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우리는 금새 그걸 거부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기 때문이다. 방송이 있었던 다음날 그는 기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가톨릭 교육에 대해 말했다. 사탕과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착해야
아름답다고 이름난 채석상을 예로 들어볼 수 있다. 대리석 채석장에 가보면 보이는 것이라곤 폐기물과 돌멩이들, 포석으로조차 쓸 수 없는 쓸모없는 대리석 파편들 뿐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멋진 건축물-교회나 성-이 구상되는 건 채석장을 뒤지면서이지만 그렇다고 건축물을 그곳에다 건립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멋진 돌을 찾아내면 그것은 곧 짐수레에 실려
우리가 열망하는 게 아주 적고 하느님과 우리 이웃을 기꺼이 사랑한다면 우리는 골무만한 크기의 행복을 가질 것이며, 그것으로 충만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거대한 웅덩이와 같은 무한한 갈증을 키우고 그것을 열렬히 좋아한다 하더라도 충만할 것이다. 우리 갈증과 우리 사랑의 크기에 걸맞은 충만함이 우릴 채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