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고통과 좌절을 보면서 은근히 즐거워하는 인간 심리의 어둡고 헤아리기 힘든 사악함. 나는 그 사악함을 나 자신의 고통에 대입해서 관찰한다. 그럼으로써 내가 우스꽝스럽거나 초라하게 느껴질 때, 그게 다른 사람의 일인 양 즐기면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이상하고 신기한 감정의 변형에 의해, 나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실패를 목격할 때 누구나 느끼는 사악하고 지
인생이란 우리가 인생에 대해 품는 생각이다. 자신이 소유한 경작지가 전부라고 여기는 농부에게 그 땅은 제국이다. 자신이 소유한 제국이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황제에게 그 제국은 한 조각의 땅에 불과하다. 가난한 자는 제국을 소유하고, 제왕은 땅 한 쪽을 갖는다. 우리가 정말로 가진 것은 우리의 감각뿐이다. 그러니 감각이 포착한 대상 안이 아니라 감각의 내면에 우리 삶의
우리의 인생이 창가에 영원히 서 있는 것이라면, 멈춰버린 연기처럼 서서 황혼이 산허리를 아프게 물들이는 똑같은 순간을 항상 지켜보는 것이라면. 그렇게 영원을 초월하여 머물 수 있다면! 적어도 가능한 한 그렇게 멈춰 서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우리의 창백한 입술로 말하는 죄를 더이상 짓지 않는다면.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라!…… 만물의 긍정적인 평온함이 내가 숨쉬는 공
나는 항상 현재에 산다. 미래는 알지 못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모든 것의 가능성이라서 부담스럽고,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라 부담스럽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과거에 대한 그리움도 없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은 너무나 자주, 아주 철저히, 내가 원했던 바와는 정반대였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내가, 내일의 인생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산다는 것은 물질의 형이상학적 실수 같고, 무기력이 저지르는 실수 같다. 나는 하루가 어떤 날인지, 나의 관심을 돌릴 만한 무엇이 그 안에 있는지 보려 들지 않는다. 여기 내가 쓰는 글 속에 기록됨으로써, 나 자신도 나를 원하지 않는 이 공허함의 찻잔을 채울 수 있는 무엇이 있는지 보려 들지 않는다. 하루가 어떤 날인지 보려 들지 않고, 어깨를 움츠린 채, 슬퍼 보이는 바깥 거리
산다는 것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느낄 수는 없다.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느낀다면, 그건 어제를 기억하는 것이지 느끼는 게 아니다. 어제 이미 살았고 그래서 잃어버린 것을 오늘 살고 있는 시체일 뿐이다. 하루가 다음날로 넘어갈 때 전날 있었던 일들을 칠판에서 모두 지우고 감정의 처녀성의 영원한 부활을 경험하며 새벽마다 새사람이 되는 것, 바로 이것만이
우리의 우월함은 많은 몽상가들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그런 우월함이 아니다. 꿈이 현실보다 우월해서 몽상가가 행동하는 사람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다. 몽상가의 우월함은 현실을 그냥 사는 것보다 꿈꾸며 사는 쪽이 훨씬 더 실용적이라는 이유에서 비롯된다. 몽상가들은 행동하는 사람들보다 삶으로부터 훨씬 폭넓고 다양한 쾌락을 취하기에 실용적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몽상
문법은 언어 사용을 규정하면서 옳고 그름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동사에는 타동사와 자동사가 있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느낀 것을 사진처럼 남기기 위해 자동사와 타동사를 일부러 바꾸어 쓰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불분명하게 보는 대신 그렇게 한다. 내가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내 영혼의 개별적인 실체성을 강조할 때는 “나는 나로서
아무도 없는 산봉우리에 오르면 특권을 누린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키로 인해 우리는 산 정상보다 높아진다. 적어도 그 장소에서는 자연에서 가장 높은 곳이 우리의 두 발 아래에 있다. 위치 덕분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왕이다. 주변 모든 것이 우리보다 낮은 데 있고, 인생은 경사진 비탈길 혹은 높이 올라 정점에 이른 우리 앞에 놓인 낮은 평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