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천사에 대해 쓰면서는 그가 나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나를 구한 장본인이었던 양 열광했다. 그래서 머리말을 지우고 후기라고 고쳐 썼다. 나는 풀려난 몸으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고 자기를 기만하는 증인이 되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일어난 커다란 불행이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강제추방을 당한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어떤 처음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 이어짐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나는 밤이면 다시 처참해질 권리를 가지려는 것일까. 왜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어째서 나는 수용소가 내 것이기를 강요할까. 향수. 마치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
내가 가진 것은 박음질한 아이뿐이다. 그는 나의 대리형제다. 내 생사를 모르는 부모님이 아이를 만들었다. 어머니는 태어났다는 말을 출생이라고 줄여 썼듯, 죽었다는 말도 사망이라고 쓸 것이다. 어머니는 이미 그렇게 했다. 어머니는 하얀 박음질 땀이 부끄럽지 않을까. 내가 그 한 줄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안다면 너는 거기서 죽어도 돼, 그게 내 입장이야. 집에 입 하나 준 셈치고
나는 믿음이 담긴 병과 의심의 담긴 병, 두 가지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 뚜껑 있는 병에는 귀향을, 나무마개로 밀봉한 병에는 수용소에서의 영원한 삶을 담은 것이었을까. 어찌 보면 그건 설사와 변비처럼 대조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투어 프리쿨리치가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베아 차켈과 말을 섞은 게 도움이 되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