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변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놀라운 건은 어떻게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나쁠 수 있냐는 것이다. 여행자들이 떠날 때와 달리 돌아올 때 뭔가 달라진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저런 이유로 여행을 포기하지 않아서이다. 돈 끼호떼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사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지만 자기만의 시와 운명를 발견할 수 있다.
정체성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좌절된 사랑의 역사, 좌절된 꿈의 역사라는 것을. 한 사람의 운명은 좌절을 억압이나 한탄, 원한이 아니라 더 나은 일로 바꾸는 것으로 결정되리라는 것을, 살기 위해서는 살게 만드는 진실한 열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문장에 얼굴과 삶을 즐겁게 비춰본다. '이제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을 잃어버렸으니, 다른 것을
나는 유족들을 보면서 조각가 자코메티의 마지막 인터뷰 내용을 떠올린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딱 한번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인간이 두 번 죽을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더 진지하고 진실해질까 상상을 해봅니다. 가령 한번 죽고 두번째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한번 상상해봅시다. 우리의 삶을 에워싼 그 많은 부질없는 것들을 걷어내버릴 수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많은 작가들에게 가장 많이 배운 것은 고통에 대한 태도들이었다. 자신의 고통을 과대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고통에 놀라는 대신 그동안 다른 사람의 고통에 얼마나 무감각했는지에 놀라는 것이 맞는다는 것과 고통스러운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 다는 것, 가장 큰 실망감을 주었던 일도 그 일 없이는 다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는 것에
'그런 이야기는 슬퍼서 더 못 듣겠어요. 힘들어져요. 남의 고통이 내 정신건강의 문제로 전락하고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슬퍼지지 않는 것, 힘을 뺏기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불쌍해, 안됐어······' 언제까지고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라면 너무 공허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할 수도
나약해져버리면 자기방어, 자기비하, 자기연민의 에고를 억누를 줄도 다스릴 줄도 모르고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하기도 어렵다. 감상적이 되지 않고는 이야기하는 법도 모르게 된다. 받아들여서는 곤란한 것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지나치게 타협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되어간다. 손쉽게 초라해져간다. #리딩런
루쉰은 젊은이들은 새로운 삶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삶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며 이렇게 썼다.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 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 이 없다. 다니는 사람이 많다보니 길이 되어버린 것이다.
"너 밖에 나가서 그렇게 말하면 큰일난다. 요새는 말 한마딘도 다들 골로 간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다들 나처럼 너를 이해해주는 것은 아니야. 다들, 다들......" 그 '다들'은 누구인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겁을 주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만들고 싶어하는 걸까? 왜 자기 말을 정당화하 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보편성을 끌어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