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라면 활동과잉의 인간을 역겨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영혼"은 "평정"을 유지하고 "천천히 움직이"며, "지나친 활발함에 대해 거부감"을 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우리 모두를 호모 사케르로 만드는 저주는 성과의 저주이다. 자기가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성과주체, 호모 리베르, 자기 자신의 주권자, 자기 자신의 경영자를 자처하는 주체는 바로 이러한 성과의 저주에 빠져 스스로를 호모 사케르로 만든다. 그러니까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 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 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무위nicht-zu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 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포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
사색적 삶은 오히 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아렌트는 활동성의 변증법을 인식하지 못한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