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나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깊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자주 자문해 왔다.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본성이 가르쳐주는 바로는, 일체의 필연적인 것은 높은 입장에서 그리고 거시적인 의미에서 보면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을견디는 것을 넘어서 사랑해야 한다. '운명애 amor fati' 이것이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본성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인생과 세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인생과 세계는 무의미한 고통에 차 있다고 여기고, 대개는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가 죽어서 갈 천국이나 미래의 공산주의에서 찾곤 하지요. 그러나 니체는 우리 자신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정신력이 약하다 보니 세계가 그렇게 무의미하고 황량한 곳으로
신앙을 가진 인간, 모든 종류의 '믿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의 존적인 인간이며 -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정립할 수 없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목적을 정립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신앙인'이란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뿐이고 사용되어야 하며, 자기를 사용하고 버릴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의 본능은 자기소멸 entselbstung 의 도덕에 최고의 명예
확신이란 감옥이다. 그것은 멀리도 보지 못하고 자기 아래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아래에 - 그리고 자기 뒤에 - 오백 가지나 되는 확신들을 봐야 한다. (중략) 위대 한 일을 하고자 하는 정신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바라는 정신은 회의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거세라든가 근절과 같은 것은 의지가 너무나도 약하고 너무나도 퇴락하여 스스로 절도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욕망과 싸울 때 본능적으로 택하는 방법이다. 즉 그러한 방법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비유적인 말도 아니지만) 라 트랍 La Trappe 수도원(엄중한 계율로 유명했던 수도원-저자 주)을 필요로 하는, 다시 말해서 자신과 열정 사이에 일종의 궁극적인 적대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를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지요.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게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삶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면서 '왜 이 짐을 짊어져야 하지?'
그는 우리가 세계라는 전체에 속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세계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어떤 숲에 갇혀서 나올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숲이 큰지 작은지, 혹은 좋은 곳인지 나쁜 곳인지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평가는 항상 비교에 입각해 있습니다. 여러 숲들을 다녀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