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외에, 아니 거짓말 때문에 이반 일리치를 고통스럽게 했던 또 한 가지는 그 누구도 그가 바라는 만큼 그를 가엾게 여겨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누군가가 자신을 병든 어린아이 대하듯 마냥 불쌍히 여겨 주기를 그 무엇보다 간절히 소망했다. 아이를 달래며 보살피듯 다독여 주고 입을 맞춰 주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바랐다.
병이 깊어지면서 그동안 <기쁨의 느낌>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모든 것들이 작동을 멈추자 그는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밖에 할 수 없다.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한 일이다.내가 느끼는 건 '모종의 기쁨', '기쁨의 느낌'인가 아니면 기쁨인가? 오미자 60% 함유인가, 오미자 0.02% 함유인가? 100%의 기쁨은 나에게 무엇일까.
문명화된 삶은 죽음을 거부한다.우리는 죽음을 불편해한다.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주변에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냥 불행한 사고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카이사르를 활용한 삼단논법을 듣더라도, 나는 아니고 카이사르만 죽는 것처럼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죽음을, 특히 스스로의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을 인지하면서
이반 일리치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대단히 끔찍한 것이었다.평범한 게 가장 행복한데 또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평범한 걸 끔찍하다고 표현했다. 자기 의지대로가 아니라, 타인과 사회가 정의하는 대로 평범하게 살기를 추구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게 스스로에게 끔찍한 것이 되는 걸까? 그게 진실한 기쁨이 아니라, 다만 자존심과 허영심을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활동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짜 기쁨은 빈트 게임이었다.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구절이다. 아마도 자기효능감이란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이게 삶에는 어떤 의미인 것인가 하는 고민을 요즘 들어 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자기효능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