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키는 대로 하고 내내 끌려다니고, 결국 죽음까지 내몰린 희생자로만 살아 온 것도 아니었다. 종규는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으며 친구였고 동료였다. 그러니까 종규의 삶에도 타인이 결코 짐작할 수 없는 성취와 감동, 만족과 기쁨, 즐거움과 고마움의 순간들이 있을 거였다.
짭짤한 치킨을 조금씩 떼어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세 식구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거실을 채운 건 고기 씹는 소리와 텔레비전 소음뿐이었다. 그는 어둠이 내린 베란다 쪽을 내다보았고 울긋불긋하게 여드름이 올라온 아들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동그래서 귀엽기만 했 던 두 눈은 가로로 길어졌고, 자그마한 코는 곧아져서 전체 적으로 선명한 인상으로 바뀌고 있
그는 판매나 영업 업무가 지난 26년간 통신주를 매설하고, 전화선을 끌어오고, 인터넷 케이블을 연결하던 자신의 현장 업무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따져 묻지 못했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교육 영상을 시청하고 감상문을 제출 하고, 어려운 경제 용어를 외우고, 복잡한 수치와 계산법을 익히는 것이 수십 년간 설치 기사로 일했던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 것인지도 묻지 못
“진짜 너무하네. 이건 정말 심하잖아요. 다른 사람들 생각도 좀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솔직히 여기 당장 회사 나가도 문제없는 사람이 몇이나 있어요? 누구처럼 아픈 새끼 병원비 대는 것도 아니고, 외벌이도 아니고. 둘씩 셋씩 애키우는 사람들도 다 나갔습니다. 다 나갔다고요 .”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다만 경제적 어려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지, 26년간 회사와
5년 뒤, 10년 뒤 고등학생인 아들 준오가 대학을 졸업하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한적한 시골로 이사한 뒤, 그 건물 에서나오는임대료로느긋하게 생활하는 꿈이 그에겐 있 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대출금 이자와원금을 성실히 갚 아야 했다. 그게 아니라도 매달 빠져나가는 자동차 할부금 과 연금, 보험료와 공과금, 준오의 학비와들쭉날쭉한 경조사비, 팔순이 넘은 양가 부
처음 저성과자로 분류되고 재교육 대상자가 되었을 때 그는 어쩌면 회사가 이런방식으로 전체 직원들에게 경고 를 보내는 것인지도모른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교육 대상 자가 되고 나서는 모두 한두 번씩 겪는 일이라고 여겼다. 회사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견뎌야 하는 과 정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세 번째 교육 대상자가 된 것이었다. 그는 이 일 을 어떤 의
그는 수리와 설치, 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통신회사 현 장팀에서 26년을 일했다. 그에겐 새끼 고양이처럼 연약하고 자그마하던 회사가 지금처럼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는데에 비밀스러운 자부심과 동료 의식이 있었다. 그런 것들은 오랜 세월 아무도 모 르게 그의 몸 어딘가에 새겨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