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편은 70대에 접어들었다. 6.25전쟁때 운 좋게 살아남은 나와 운 나쁘게 고아가 된 남편은 둘 다 씩씩한 전후 세대라서 불행한 역사와 풀기 힘든 정치사건들은 모두 외면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세월을 보냈는데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되었다. 참 긴 세월이었다. 그 사이에 오일쇼크가 있었고, IMF도 왔다가 갔다. 그러나 한가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남북문제다. 군부독재는 물러갔지만, 정치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풀리지 않는 실타래다. 누군가의 말처럼 통일이 낭만적인 민주화운동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예전엔 몰랐다. 김민환 작가의 새 장편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난다“(문예 중앙, 2021, 3)를 읽으면서 어디서부터 우리 역사가 왜곡되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왜 무고한 시민들이 공권력에 의해 어이없게 죽임을 당하고 그리도 값없이 던져지는지. 보성의 명문가 장손으로 태어나 3,000석 재산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면서 구휼 및 민족 계몽 사업을 해온 주인공 봉강 정해룡의 해방 전후 활동상은 누가 보아도 순리적이고 양반의 격과 품위를 갖춘 활동이었다. 그는 가문 대대로 지켜온 삼의(三宜), 나를 감추고, 선영 모시기, 자손 교육을 )’를 삶의 도리로 삼으면서 매 순간 인의에 바탕을 둔 온건한 처신을 했다. 그런데도 그는 여러번 체포되는 수모를 당하고 몰락의 길을 걷는다. 잘못이라면 단독정부 구성을 추구하는 이승만·김일성과 달리 남북 화해와 민족 통일을 추구하는 여운형을 지지하며 통합을 꿈꾸었다는 것. 이 소설은 정씨 일가의 가족사적 소설로 전개되지만 거의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6, 70년대에 와서도 수많은 젊은이가 평화통일을 주장하다 빨갱이로 몰리기도 하고 공안 당국의 제물이 되었다. 필자의 가족사에서 보듯 전쟁의 피해와 경험은 보편적 사건이자 현재 우리의 삶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김민환 작가는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의 이념 격돌 속에서 절충안을 내세웠던 여운형의 정치세력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사회학자적 시선으로 펼쳐 보여준다.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다 결국 암살을 당했던 여운형처럼 그를 따랐던 봉강의 비극도 그러니 예견된 것이었다. 게다가 월북한 동생 때문에 그의 삶은 더 꼬여만 간다.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국회의원선거에서 떨어지고 아들과 조카들은 연좌제로 취업을 하지 못하며, 재산은 한없이 줄어든다. 마지막 장에서 밝혀지는 ‘죽잃난또 간첩단 사건’은 비극의 절정이다. 1981년 1월에 전모가 드러난 정춘상 가족 간첩단 사건은 일명 죽잃난또 간첩단 사건이라고도 알려졌는데 월북한 봉강의 동생이 1965년 남으로 내려와 정씨 일가들과 접촉한 사건이었다. 15년 만에 탄로가 나면서 친인척 37명이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재판에서 몇 명은 10년 이상의 징역을, 실제로 삼촌을 따라 북에도 다녀왔던 봉강의 큰아들은 사형을 당한 사건이다. 7, 80년대가 어떤 시대인가? 이 사건이 탄로되기 전에 봉강은 세상을 떠났지만, 간첩 가족이란 비밀을 가슴에 품고 견뎌냈을 삶의 무게가 어떠했을까 짐작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함께 월북하자던 동생에게 ‘대신 아들을 데려가라’ 말했으니 살아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지수의 사진관에 들러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죽음을 예감했는지, 죽음을 결심했는지 모르나 며칠 후 입에 거품을 물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고 만다. 이 소설의 미덕은 600여페이지에 달하는 긴 부피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작가 특유의 간결한 지문에 풍부한 전라도 남부지역 사투리가 어우러져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다. 전라도 지방에 사투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인네들의 질펀한 생활언어 말고 어머니 윤 씨 부인의 양반 언어는 매우 독특해서 자꾸 곱씹어진다. “우리 거북정 아녀자 가슴속에는 원등할머니가 들어앉아 계시다. 너도 잘 알 것이다 만은, 그 당신의 큰 아드님 혁자 할아버지께서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자 당신의 자부이신 광주 이씨 정려할머니께서 스물여섯의 나이에 스스로 교사허시었다. 가문이 풍전등화에 처했을 적에 원등할머니께서 아주 돌올 허신 위품으로 집안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가세를 오히려 키우셨다. 다 내가 보지 못헌 일이지만 이 집에 들어와서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이다.” 어느 가문에나 한사람 정도 있었을 전라도 양반 가문 여인의 고급스러운 대사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김민환 작가는 이번 소설이 세 번째다. 은퇴 후 보길도 남은재에 머물며 첫 번째 펴낸 책이 고구려의 승려 화가 ‘담징(曇徵)’의 일본 체류 시절 이야기였고, 두 번째 작품은 성장소설 격인 ‘눈 속에 핀 꽃’, 그리고 이번에 세 번째로 본격 장편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를 썼다. 책 제목은 모두가 아는 장자 1편 소요유에 있는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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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절미하고 정말 재밌게 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