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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울렁증으로 체할 것만 같은 책이 있다. 행복한 체증이다. 그런 책은 손에 들고도 차마 펼치지 못한 채 오래 응시하다 힘겹게 읽게 된다. 대체로 시詩적인 내용의 책이 그렇다. 이 책 『예술의 주름(나희덕, 마음산책)』처럼.
예술은 보고 듣고 말하지 않아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보고 있음에도 그리운 것이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물이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오만 감상으로 술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다만 물음표(?)와 느낌표(!)로 행복한 그 무엇. 이것이 바로 예술의 최종 목표가 아닐까.
읽을수록 표지 그림에 대한 시적 몽상을 하게 된다. 확실히 본문의 내용을 잘 수렴한 디자인이다. 나는 으레 책을 다 읽고 나면 본문과 저자는 물론 그 외의 것들에 대해 사색하곤 한다. 그런 연후엔 그 과정을 글로 옮긴다.
세상의 모든 비주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저 뒷모습의 여인과 무언의 담화를 나누고 싶다. 그녀가 나희덕 시인이라 생각하면서. 예술이 예술을 알아가는 시간을 공유하는 일의 행복을 나는 이 책에서 다시 한 번 느꼈다.
1. 미술의 미술에 의한 미술을 위한
“나는 뭔가가 되어가고 있어.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격렬하게 행복한 순간을 살고 있어.” (위의 책, 74쪽,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파울라 모데르존 베커의 말)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 (87쪽, 시인 뮤리얼 루카이저의 시, <케테 콜비츠>(부분)) 고통의 정도와 크기는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나는 왠지 예술가들의 생몰 시기와 그것이 비례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릴케와 세잔, 고갱과 알고 지냈다던 화가 파울라가 딸 출산 후 31살의 나이로 별이 된 것처럼. 그보다 장수한 예술가들도 많지만, 어떻든 비주류 여성 화가로서의 삶과 누군가의 배우자 또는 엄마로서의 삶의 조합이란 내가 생각하기로 장수長壽와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이다.
시인은 남성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여성 예술가들의 삶과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이는 결코 그녀 자신이 여성이라거나 페미니즘을 지향에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여전히 현재진행중인 변화 속에서 그녀들이 어떻게, 무엇으로, 어떤 삶을 거쳐 왔는지를 재조명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이를 시인은 시적 언어로 맛있게 버무려 결국 ‘감동’이라는 결과물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가 다른 예술가에 의해 물질적 형태로 구현된 것을 목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 낯선 예술가가 마치 영혼의 쌍생아처럼 각별하게 여겨진다. (위의 책, 100쪽)
내내 천착하고 있던 내 사유와 마침 일치하는 사람과 풍경, 사물 등을 접하면 무지 반갑고 설렌다. 시인도 시오타 치하루의 전시를 보며 위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2년 전에 쓴 자신의 시 <붉은 거미줄>이 떠올랐기 때문인데, 그런 경험이 많을수록 시인은 시로, 화가는 그림으로, 영화감독은 영화로서 그 감흥을 표현하기 마련이다. 거미가 자신의 몸에서 거미줄을 뽑아내듯. 나 또한 지금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감상의 최대치를 글로 짓고 있다. 그럼에도 늘 역부족임을 한탄하곤 하지만.
설치미술가인 시오타 치하루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이주했다가 한국인 남편과 사는, 그야말로 정체성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다국적 삶을 살았다고 한다. 거미와 붉은 실, 그리고 철제 등의 재료를 활용한 그녀의 작품을 본 후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여성 예술가들의 내면에는 끊임없이 실을 뽑아내고 천을 짜는 거미가 살고 있는 것 같다.” (위의 책, 100쪽)
2. 소리의 소리에 의한 소리를 위한
그런가하면 이 책은 우리의 오감을 은밀하게 건드려 준다. 미처 체험하지 못한 우리의 낯선 감각을 어딘가 익숙한 그것으로 전이시켜주는 시인의 속삭임이 아름답다. 몽글몽글 피어나는 소리에 가만가만 귀 기울이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이로써 생생함과 전율의 경계에서 안심하고 마음껏 휘둘릴 수 있는 자유를 준달까.
우열을 따질 수 없지만, 나는 특히 ‘소리’에 민감하다. 한때는 팝과 영화 OST, 클래식 등의 음악을 지겹도록 들었다. 그렇게 ‘소리’가 서정으로 천천히 물들어가던 중 나는 운명처럼 한편의 영화를 만났었다.
<어거스트 러쉬 August Rush>. 나는 이 영화를 본 후 그 감동과 여운에 며칠 몇 날 잠 못 이뤘다. 내용인즉, 아들의 생존도 모른 채 10년이 넘게 뿔뿔이 흩어져 살던 가족이 음악으로 마침내 상봉하는 영화다. 엄마는 첼리스트, 아빠는 밴드 보컬이자 기타리스트, 아들은 음악 천재. 자신이 만든 음악으로 엄마를 찾아나서는 아이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창조하는, 말하자면 음악 하는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부모의 태반에서 우린 이미 온갖 소리에 노출된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 엄마의 심장 소리, 청소기 소리, 물소리 등등. 교육 이전의 존재인 태아는 그렇게 소리인 줄 모르는 다양한 소리를 듣게 된다. 생명체로서 감각할 수 있는 모든 소리를. 이를 ‘선율’로 인지하기까지는 출생 이후의 삶에 달려 있다.
음악은 내가 듣는 게 아니고 음악이 나를 읽는 것이다. 음악에 매혹되는 게 아니라 음악이 날 찾는 것이다. 아주 작은 세포에 불과했던 인간이 ‘음音’을 감각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를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했다는 점은 일면 위대해 보인다. 하지만 모든 결과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원인 없는 결과를 도출할 수 없듯이, 음악이 음악 이전의 소리로 존재했기에 가능했던 인간의 창조력은 그에 비하면 후발 주자인 셈이다. 그러니 인간은 소리音 앞에 겸손하고 감사해야 되는 건 아닐까. 우리에게 그대들(소리)을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을 줘서 고맙다고.
바흐의 곡을 즐겨 연주했다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그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끝도 시작도 없는 음악, 진정한 긴장도, 진정한 해결도 없는 음악”(155쪽)이라고 표현하면서 ‘고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술가는 고독 속에서만 진정으로 일할 수 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끊임없이 통제되는 그런 환경 속에서만”(158쪽)
어쩌면 소리音의 목적은 ‘고독’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홀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그의 은밀한 유혹에 이끌린 인간은 그의 행복한 노예로 전락한 셈.
3. 시의 시에 의한 시를 위한
나는 장르 구분을 대놓고 꺼린다. 글을 쓰면서도 수필, 소설, 시를 운운하며 왜 장르를 구분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런 나는 아주 가끔 독서 감상문의 고질적 형태를 벗어난 형식으로 글을 남기곤 한다. 자작시로 된 리뷰를 쓴다거나 다짜고짜 밀란 쿤데라를 친구 삼아 서간체로 된 리뷰를 쓴 바 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명명하고 구분 짓기를 참 즐기는 종種 같다.
‘미술=(음악)소리=시’ 나는 문학·예술을 늘 동일한 것으로 인식한다. 삶과 죽음이 서로의 일부이듯이 각자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그러므로 나에게 시는 그림이면서 음악이기도 하다.
오래전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고나서 감동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죽는 줄 알았다. 원작을 먼저 읽고 본 영화였다. <그리스인 조르바>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그때 고요와 역동이 잘 버무려진 시 세계에 참을 수 없는 방정을 떨어야만 했는데, 심적으로는 혼란을 정제해야 했고 육적으로는 사진을 촬영해댔다. 나는 곧 그것들을 모아 데생을 남기고 리뷰를 썼다.
누구라도 시인이 될 수도 있음을 <일 포스티노>와 <패터슨>은 보여준다. 우체부와 버스 운전사라는 직업職業과 별개인 시인은 자연과 세상을 향한 세밀한 관찰과 새로운 안목을 바탕으로 언어로써 재탄생시킬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이를 네이버 어학사전은 ‘시를 전문적으로 짓는 사람’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이렇게 간단할 수가. 왠지 발끈하게 된다. 시인에 대한 모독 같아서. 이번에는 ‘시’를 검색해 보았다. ‘문학의 한 장르.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다. 형식에 따라 정형시ㆍ자유시ㆍ산문시로 나누며, 내용에 따라 서정시ㆍ서사시ㆍ극시로 나눈다’(네이버 국어사전) 이제 좀 낫다. 형식에 따른 분류만 빼면.
어릴 때 너는 배운다 / 사물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 / 높이, 넓이, 그리고 깊이. / 신발 상자처럼. / 그리고 나중에 너는 듣게 된다 / 네 번째 차원이 있다는 걸 : 시간. (232쪽, 영화 <패터슨>에 나오는 시 <다른 하나> 중, 시인 론 패짓 作)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시詩’적 감수성을 다양하게 인용할 수밖에 없음이다. 신발 속에 들어간 높이, 넓이, 깊이, 시간을 그림과 음악으로 표현된 작품을 상상해보자. 장화, 구두, 하이힐, 운동화 등등 신발의 크기와 연식, 종류별로 작품을 만나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연상과 상상을 시로 표출했을 때의 희열과 감동은 그 자체에 있는 듯하다.
“1집 앨범의 타이틀곡인 <행복한 사람>에서 그는 “울고 있나요 / 당신은 / 울고 있나요”라고 말을 건넨 뒤, “아, 그러나 / 당신은 / 행복한 사람”이라며 마음을 쓰다듬는다. 그런ㄷ ‘당신’이 행복한 이유는 “아직도 남은 별 / 찾을 수 있는 / 그렇게 아름다운 / 두 눈이 있”고, “아직도 바람결 /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 그 마음 있”기 때문이다. (251쪽)
검색해 보니 <행복한 사람>은 조동진 씨가 1979년 데뷔한 1집 앨범 타이틀곡이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태어난 그는 지금은 고인이 된 가수다. 하지만 자신이 남긴 노래로 어쩌면 그는 제 2의 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희덕 시인에 따르면 그는 ‘대기의 감별사’로 그가 생각하는 ‘행복한 사람’은 “슬픔 속에서도 남은 별을 찾을 수 있고 바람결을 느낄 수 있는 이”(251쪽)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많던 별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몇 개 남지 않은 별을 찾아 헤매는 사람의 눈빛과 마주한 나는 그가 만든 곡 <긴긴 다리 위에 저녁해 걸릴 때면>을 듣고 있다. 노래 제목이 다 그 자체로 시인 것만 같은 그의 곡들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줄 잘 모르겠는 사람들이 들었음 싶은 곡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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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주의해 주세요.) 나희덕 작가의 <예술의 주름들> 리뷰 입니다. 솔직히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거든요. (석사 논문 주제가 "시"였다는 건 모른 척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소설 읽기도 게을러져서 시는 더더욱 들여다보기 어려운 장르가 되어버렸어요. 그렇지만 시인의 에세이는 정말 좋아하는데 제가 이런 취향을 갖게 해준 첫 시인이 바로 "나희덕" 시인입니다. 그의 <반통의 물>이란 에세이는 웬만해서는 재독하지 않는 저도 재독에, 삼독까지 할만큼 좋아하고요. 이후 나왔던 에세이<저 불빛들을 기억해>도 <반통의 물>만큼은 아니지만 잘 읽었습니다. 그런 그의 신간 에세이가 나왔는데 여부가 있으려나요. 바로 구입했습니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예술이라니, 안 사고 버틸 수가 없었어요. 정말 좋았습니다. 주제가 취향에 맞지 않는 독자라 하더라도 시인의 문장을 음미하기 위한 목적으로 책 구입을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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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봄의 끝자락, 여름 문턱의 신호를 한낮의 작살비로 안내받고 있다. 몰염치와 정중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이 비를 또 다른 신호로 감지한 하나의 중대 사건과 함께.
『예술의 주름(나희덕, 마음산책)』을 읽던 중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 편의 시와 그 시를 지은 나희덕 시인을 만났고, 이내 운명과 필연에 가깝다는 착각과 기쁨, 반가움이 뒤섞인 상태에서 그녀에 대해 무지했던 그동안의 세월을 개탄해야만 했으니. 이건 마치 오래 졸던 어느 신이 뒤늦게 일어나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으나 늦어도 심하게 늦어버린 어떤 과업 같달까. ‘신이여! 왜 그러셨나요? 10년 전 아니, 5년 전에만 일찍 일어났어도 좋았잖아요.’ ‘어리석은 이 중생아, 다 그만한 깊은 뜻이 있느니라.’
위의 책에서 시인은 다양한 분야의 많은 예술가를 다루고 있다. 각각의 챕터를 구성하고 있는 이야기들의 향연 속에서 나는 그 식상한 표현이 떠올랐다.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 완독하지 않은 그 책의 전체적인 감상문을 끝마치기도 전, 나는 위의 중대 사건과 마주한다. 다름 아닌 <창문성>이란 시가 마음에 머문 채 떠나질 않았던 것. 더 이상 완독과 쓰던 감상문이 문제가 아님을 안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누운 채로 곁에 두었던 수첩에 아무 글이나 휘갈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생각나는 대로, 펜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였다. 그러고는 노트북 전원을 켠 뒤, 초스피드로 점심을 해치우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이제 내 심장에 과하게 불을 지른 시를 만나 보자.
창문성
나희덕
저 집은 왠지 화가 나 있는 것 같아 저 집은 감미로운 불빛을 가졌군 저 집은 우울한 내면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지 저 집은 저녁 다섯 시에 가장 아름다워
그녀는 집의 표정을 잘 읽어낸다 창문성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이 있다는 듯 집마다 눈으로 창문을 두드린다
풍경을 삼키기도 하고 내뱉기도 하는 내면을 감추기도 하고 들키기도 하는 저 수많은 창문들은 집의 눈빛일까 입술일까 항문일까
물론 그녀는 알고 있다 창문성이 창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 『예술의 주름』, 나희덕, 마음산책, 260쪽, <창문성> 부분
시인이 위의 시를 쓰게 된 계기는 그녀가 구매한 장민숙 화가의 작품 <산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크고 작은 집들이 빼곡한 그 작품의 색채는 집 벽의 베이지 색을 제외하면 3원색이 대부분이다. 빨갛거나 파랗거나 푸릇하거나. 희미하게나마 노란 기도 조금 있다. 그녀는 그 작품을 잘 보이는 벽에 걸어두고 거기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림 속의 집들은 저마다 표정을 지니고 있어서, 눈처럼 보이는 창문과 입처럼 보이는 문을 통해 무슨 말인가 들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집에 앉아 있어도 저녁 산책에서 돌아오는 사람의 마음이 되곤 했다.(위의 책 258쪽)”고 말한 시인은 그렇게 <창문성>이라는 시를 쓰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산책>이 아닌 시인의 시 <창문성>에 더 마음이 끌렸다. 평소의 습관대로라면 전자를 감상한 후 나의 그것과 시인의 감상을 비교해보는 게 먼저였고, 시 감상은 그 후가 되어야 했다. 살다 보면 돌발 행동을 자주 하게 된다더니 오늘이 바로 그랬던 모양이다. 어떻든 나는 그 일로 그동안 나 자신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나의 취미 성향을 알게 되었다. ‘아, 나는 사물(시각 물체)과 언어가 동시에 노출되면 언어 쪽으로 먼저 심장이 기우는구나.’
<창문성>을 다 읽고 난 뒤, 가장 먼저 느낀 건 시인의 ‘고독’이었다. 어디선가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에 대한 글을 여러 번 접한 적이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대략 이렇다. 타인의 필요 유무나 당사자의 선택(자유의지)에 따라 둘을 구분한 다수의 혹자들은, 전자는 혼자 있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것으로 후자는 자발적으로 홀로 있음을 즐기기에 전자에 비해 후자를 고차원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외로운 사람에 비해 고독한 사람은 어딘가 인문학적·철학적인 사색가로 격상되면서 어느 순간 예술인들의 그것과 동격의 자리를 꿰찬 느낌이랄까. 그렇다면 애초에 예술인이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겠다 싶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그만큼 꽤 많은 사람들이 그 두 가지 감정을 겪으며 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하물며 시인임에야...
산책은 으레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는 일종의 낭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타인이 사색의 방해요소로 느껴지는 사람들이 주로 혼자 산책하는 것 같다. 위의 다수 혹자들의 견해대로라면 산책은 일면 고독과도 닮아 보인다. 나 또한 풍경과 그들이 가진 온갖 색과 소리들을 구경하며 혼자 하는 산책을 즐기곤 하는데, 감사하게도 그 과정에서 때때로 ‘글’과 ‘낭만’이란 덤까지 얻기도 한다. 요컨대 시인은 고독과 낭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가두지 않고 시로써 발산하고 향유할 수 있는, 세상의 몇 안 되는 사람이 아닐까. 산책은 그것을 마치고 난 후에도 공허감이 덜하다.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개운함으로 심신의 피로가 이완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설령 공허감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나 그림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데, <산책>을 그린 화가도 아마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싶다. 이를 오롯이 전달받은 시인은 그렇게 시 <창문성>을 짓는다. 겹겹이 둘러싸인 집들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고 창문과 문을 내듯이.
예리한 시인은 그 집들에서 여러 가지 표정을 읽어낸다. 화나고 감미롭고 우울한 집들과 저녁 5시면 가장 아름다워지는 집을 발견하고 조금이나마 안도하면서. 시인은 급기야 “창문성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이 있다는 듯 집마다 눈으로 창문을 두드리”게 된다. 하지만 집 안에 있을 누군가를 소환하려 노크하던 시인은 모든 게 조심스럽기만 하다. 혹여 주인의 달콤한 잠이라도 깨우는 건 아닌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망설임과 조바심 덕분에 시인은 이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풍경을 삼키기도 하고 내뱉기도 하는 / 내면을 감추기도 하고 들키기도 하는 / 저 수많은 창문들은 / 집의 눈빛일까 입술일까 항문일까”
“집의 눈빛일까 입술일까 항문일까”에서 ‘눈빛’, ‘입술’, ‘항문’은 모두 하나의 ‘홀(hole)’로서 은근히 공개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동시에 반쯤 막힌 홀이기도 한 그것은 보일 듯 말 듯한 반半 폐쇄성을 띄기도 한다. 탈출 불가능한 이 비밀 스폿은 관찰자로 하여금 어떤 에로틱함을 이끌어낸다. 그 정체를 탐색하는 매혹의 순간, 그것들은 현재 내 연인일 수도, 짝사랑 중인 그 누구일 수도, 어느 시공간에서 만난 시인의 모든 것일 수도 있다. “그녀는 알고 있다” 그것이 어둠 속에 갇혀 빛으로 해방되길 바라는 존재들의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눈빛, 입술, 항문에 닿아 있던 시선은 어느덧 창문 개방자인 시인 자신에게로 옮겨진다. 하지만 그녀는 창문을 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폭로되고 까발려진 것들의 허망함을 시인은 원하지 않기에, 비밀은 비밀로 존재함으로써만 그 본연의 가치가 있음을 아는 그녀는 그것을 열고 싶은 욕망을 그렇게 고요히 접으며 이렇게 읊조린다. “창문성이 창문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시인도 당신도 나도, 실은 우리 모두가 다 창문인 것을, 그것이 곧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을, 시인은 자신의 시로 꼭꼭 감추기로 한다.
울창한 비밀의 숲(창문)이 거기, 시인의 눈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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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바라보는 데 있어 시야를 키우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르는 다를지라도 추구하는 지향점이 한곳을 향하는 것은 진정한 예술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에 읽은 예술의 주름들은 시인이 본 미술이라는 점에서 매우 신선한 느낌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작품을 바라보면 시인이 느끼는 바를 알 수 있었던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재미있게 한 권을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어 무척 좋았습니다. 특히 작품에 대해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옆에서 감상을 주고받는 듯한 구성이어서 친근감과 함께 시인이 바라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예전에 본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만화에서 음악가지만 음악에만 묻혀 산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발전이 없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시인이지만 시에만 묻혀 산다면 더 넓은 것을 배우지 못하고 그저 문자 속에 파묻혀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예술 전반을 즐기는 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키우는 것이라 생각하며, 넓은 시야를 가지는 것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데 확실히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술의 주름들 한 권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며 오랜만에 가슴에 남는 한 권의 책을 읽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