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의 지성과 삶에 대한 통찰력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책. 거의 헤르만 헤세의 책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건 '데미안' 일 듯 한데, 실제로 헤세가 노벨 문학상을 탄 것은 이 유리알 유희에 대해서이다. 데미안이 비교적 젊은 시절에 쓰여져서 아직 혼란 속에서 본질을 찾아 헤매고 그 윤곽을 붙잡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유리알 유희는 작가가 이미 노인이 되어 그때까지 쌓아온 온갖 해박한 지식과 깨달음을 총동원한 거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그 자체로써 하나의 뚜렷한 세계이며, 자각이고, 놀라운 발견과도 같다. 카스탈리엔이란 가상의 공간은 몹시 매혹적이었다.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가 종국에는 버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공간. 유리알 유희란 대체로 예술에의 빗댐이며 카스탈리엔도 예술 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상징하는 듯하다. 조금 더 넓게 보면, 성직자, 인문학자 등속의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 대다수를 지칭한다고 볼 수 도 있다. 그들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생활하고 창조하는 곳이 카스탈리엔이다. 온갖 육체적 타락과 정신적 불안을 겪어 낸 인간들이 마침내 정신적 깊이의 가치를 인정하고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체계. 미래의 엘리트들이 기거하는 정신의 성. 그런데 최고의 유희 명인으로 추앙받는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그곳을 자발적으로 뛰쳐나온다. 일견 유토피아처럼 보이는 카스탈리엔에서 마저도 그는 안주하려 하지 않은 것. 나는 크네히트가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지독하게 중도를 찾아 헤매는 예술가. 그는 몇 안되는 진짜 예술가다. 무엇에 관한 중도였을까.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금세 알 수 있다. 크네히트는 세속에서 카스탈리엔의 학교로 다니러 온 친구, 플리니오 데시뇨리에게 영향 받았다. 플리니오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저 높은 경지를 지향하는 카스탈리엔을 반쯤 인정하고 반 쯤 경멸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정신적 성에 갇혀버릴 운명이라는 것.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은 좋은 친구이자 경쟁자로서 소설의 두 축을 이룬다. 플리니오의 위와 같은 견해에 크네히트는 특유의 차분하고 여유 있는 태도로 반박을 하지만 마침내 버리고 뛰쳐나온다. 그것은, 카스탈리엔에의 절대적 부정도, 플리니오의 세속적 삶에 대한 동경 때문도 아니다. 크네히트는 고여서 썩어가는 물처럼 정신이 안주하여 썩기를 원치 않은 것이다. <계단> 꽃이 모두 시들 듯이, 청춘이 나이에 꺾이듯이, 인생의 각 계단도, 지혜도, 덕도 모두 그때 제 철에만 꽃을 피울 뿐 영원하지는 않네. 삶의 외침을 들을 때마다 마음은 서글퍼하지 않고 용감하게 새로운 속박으로 들어가듯이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다져야 하네. 무릇 시작에는 신비로운 힘이 깃들어 있고...... 그 힘은 우리를 지켜 주고 살아가도록 도와 주도다. 우리는 명랑하게 공간에서 공간으로 나아가야 하네. 어디서든지 고향처럼 집착해서는 안되네. 우주 정신은 우리를 잡으려고도, 구속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우리를 한 계단 한 계단 높여 주고 넓혀 주려 하네. 한 생활권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편안하게 길들여진다면, 탄력을 잃지 쉬우니, 늘 출발과 여행의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마비된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임종 때에도 여전히 새로운 공간을 향하여 젊고 기운차게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리. 우리를 부르는 삶의 외침은 결코 그치는 법이 없으리라...... . 그럼 좋아,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 요제프 크네히트의 유고 중에서 발견된 시. 이 시는 그가 소년 시절에 쓴 것으로 마치 그의 삶을 예견하고 있는 듯 하다. 그의 삶을 관통해 온 '변화' 와 '성장'이라는 가치. 아울러 <계단>은 내가 이 책을 읽고서 받은 어떤 아름다운 감화작용, 과도 크게 무관하지 는 않은 듯 하다. 중도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자세, 아름다움에 대한 성찰을 하게끔 해 준. 개인적으로 '삶은 변화하는 데만 있다'는 채호기의 말에 십분 동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쉽게 변하지 않는 것도 미덕' 이라는 가치를 배제하는 것은 아닌 법.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가 유연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도라고 생각한다.계단>계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