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성공되게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성공의 모습을 쫓아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고있다. 나는 이책을 읽고 진정한 성공의 모습을 찾았다. 이 책의 주인공인 프랜치스 치셤 신부는 사람들이 알아주는 부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카톨릭회에서 알아주는 명예를 가진 높은 지위를 가진이도 아니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것을 입지 못했으며 인생의 쓴맛과 실패의 아픔을 실컷맛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무엇이 성공한 인생이란 말인가...그는 출세를 쫓아 세상과 타협하여 처신하지 않았으며,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거룩을 나타내지 않았다. 자신의 종파만이 옳다고 다른이의 종파를 핍박하지 않는 관용을 가진이었다. 또한 그는 실패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가진이로 중국땅에서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고 역경을 몸을 부딪쳐 해결하면서 진정한 크리스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생의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그는 부도 명예도 가지지 못했지만. 그는 인생의 경륜과 지혜를 가졌으며, 진정으로 자신을 존경하고 그뜻을 같이하는 동역자들을 가졌다. 또한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여 그 후에 그가 일궈놓은 터전에서 한걸음더 진보된 삶을 살게된 중국오지인들의 미래를 가졌다. 프랜치스 치셤은 자신 한사람의 인생을 투자하여, 수많은 고아들과 주민들의 삶을 바꾸놓았으며, 그들에게 바른 삶의 모습을 제시하였다. 이 중국인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그 삶의 제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낸다면 그 여파는 이 세상 그 어느 성공과도 비교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 나는 이 책을 중학교 3학년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다. 겨울방학 내내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정말 열번 정도는 읽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도 줄거리가 생생하다. 치셤 신분와 안셀모 신부의 대립구도를 기본축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알게 모르게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소설속 치셤 신부의 삶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느냐는 본질적인 질문을 늘 가슴에 새기게 하고 있다. 물론 이 소설은 서양신분가 주인공이고 중국이 포교지역으로 묘사되었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을 옥에 티로 보기에는 이 책이 지닌 장점이 더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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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종교적 가치관의 대립이 주를 이룬다. 치셤은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적 박애로 발달시켰으므로 종교 윤리에 충실한 다른 신부들과 대립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종장의 시작'을 앞에다 배치한 것도 대립의 모습을 암시해준다. 이런 대립들과의 고행을 꿋꿋이 인내하여 참된 하느님의 사랑을 터득하였으니[치셤], 종교적 갈등의 원인에 대해서도, 모든 갈등의 원인에 대해서도 그 근본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치셤과 대조되는 안셀모 밀리는 크게 성공하지만 끝에 와서는, 수식어만 유창하고 신도 수에 관심이 크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밀리는 종교의 근본 목적과는 거리를 두는 것인가. 진정 종교인이라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필요가 있지 않는가(혹은 예수). 그러나 치셤의 박애도 분명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갈등 심지어는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치셤이 병사를 치유하려다 성당의 안전을 위협받는 장면처럼, 하나를 살리는 것이 다수의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에 속수무책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치셤은 운이 따라주었기에 살 수 있었다.(여기서는 진정 초월적인 힘으로 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p.312, 치셤의 ?불이 명중) 또한 버려져 있던 것을 키운 안나의 부정적인 성숙 모습을 통해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가 하는 의문도 제기된다. 치셤은 탄식한다. 안나가 왜 그렇게 컸을까... 여기서 치셤의 고뇌, 즉 참된 사랑의 실천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드러난다. 또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강력한 맞수이자 헌신적인 베로니카 수녀와의 갈등. 늘 냉정하던 베로니카 수녀를 인내심과 차분한 설득으로 동화시켰으니(치셤과의 차가운 관계가 베로니카 수녀의 반성으로 완화됨), 종교를 초월한 선겨사의 진정한 면모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에게 환기해준다. 종교의 본질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그러나 치셤에 대해 안타까운 점도 있다. p.279, 21번째 줄, "클로틸드 수녀님, ~에 불과한 것이지요."라는 대사가 의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어떠한 인과관계든,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는 격이다. 인간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지식을 터득하는데, 인간의 뇌도 하느님이란 존재가 조정하는 것인가. 태초에 인간에게 하느님이란 존재는 없었다. 'A.D'의 유래가 왜 나왔겠는가. 인간이 먼저 탄생하여 그들 나름대로 인과관계에서 살아왔는데 반드시 하늘의 뜻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페스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다 죽어가고, 전쟁의 난민들을 보고 탄식하는 치셤은 '하느님이 설마 ~'라는 의문을 품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논리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종교의 실질적 가치를 탐구하므로써 그 어떤 종교에도 심취해있지 않은 나에게 공감을 주고, 작가의 대사와 문장 표현력, 日記를 통한 시간의 변화주기법 등 꼼꼼한 문장력에 찬사를 보낸다.
*이런 저런 느낀 점들이 뒤죽박죽 떠오르는데, 그에 대해 정리를 하는 것이 고민되었다. 따라서 손가는 대로 쓴 범위에서 정리만 하므로써 감상문을 마쳤다. *내용상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쥬디, 후노인 등 몇 인물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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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덮고 나서 한참을...(지금도) 내 가슴의 뛰는 소리를 들어야했다. 참 오랜만에 책을 읽고 느끼는 감정이다. 고등학교 시절 "폭풍의 언덕"을 읽었을 때의 그 격정적인 감정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고전소설의 무게감이 전해졌다고 할까? 좋은 소설은 오랫동안 여러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예전부터 제목은 익히 들어왔었지만, 굳이 찾아 읽으려 하지 않았었는데. 우연한 기회를 통해 내게로 오게 된 책. 기독교인 나. 3년만에 만난 교회언니를 통해 건네 받은 책. 오래된 책 겉표지와 많은 분량으로 선뜻 손이 안갔지만, 어쩜 이 책이 내 거였다면 아직도 방치 될지도 모르겠지만. 돌려주어야한다는 의무감에 읽게 된 책. 과연 오늘내에 읽을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함께 펼쳐들었다. 솔직히 처음 몇페이지에서는 책을 놓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받았는데, 그렇게 되면 이 책을 영영 읽지 못할것 같은 생각에 계속 읽었다. 책을 다 덮었을때는 "천국의 열쇠"는 나에게 커다란 만족감을 주었다. 아마도, 치셤 신부가 느꼈던 종교적 갈등은 우리부부에게도 많이 공유 되는 심정이다. 그리고 이국적에서의 생활과 종교관... 사실 나는 기독교이지만, 신랑은 복사까지 한 카톨릭 신자였다. 나와 결혼하면서 자연스레 나와 함께 교회에 다녔다. (시아버지께서는 기독교신자이시고 시어머니께서는 무신론자이시다.) 한국을 떠나 미국이라는 낯선 땅을 밟게 된 4년전. 처음 이곳에 도착할때 우리부부 역시 이곳 교회에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그분들이 보여준 배타적인 종교관에 사실 이곳의 6개월간 교회생활을 청산하고 지금은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나 때문에 개신교를 선택했던 신랑에게 무척 미안한 마음만 남긴채 말이다. 사실 나보다 신랑이 더 상처를 많이 받았으니깐. 종교의 상처가 가실 무렵 우연히도 한국에서 같은 교회를 다니던 분이 이곳에 오게 되어 또 다른 인연이 되고 언니가 이 책을 빌려주었다. 어떤면에서는 그 점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암튼, 종교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프랜치스 치셤 신부와 안셀모 밀리 신부의 상반된 삶을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에게 여러가지 생각을 주는것 같다. 과연 두분의 삶 중 어떤 삶이 정말 의로운 삶일까? 물론, 주교가 되었다고 다 안셀모 밀리 신부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것은 아니다. 러스티 맥과 같은 주교는 프랜치스 치셤의 본질을 앓아보고 그가 옳바른 길로 가도록 도와주기도 하니 말이다. 러스티 맥 주교처럼 그의 신앙을 바로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깨달음을 얻은 베로니카 수녀. 항상 무신론을 일관하며 종교에 비판을 했지만, 종교인보다 더 훌륭하게 죽어간 윌리 탈록 의사. 34년간 치셤신부의 중국 포교를 도와줌으로써 자신의 은혜를 갚으려했던 결국엔 진정한 치셤신부의 마음을 느끼고 종교에 귀화하는 챠 유지. 같은 신을 섬기지만 그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배척해야하는 그러나 진정한 종교는 그런 모습이 아니란것을 보여준 피스크 부부. 치셤신부가 중국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 진정한 이유를 알게 해준 안드레이. 등장인물마다 치셤신부와 엮이면서 그사람들의 삶도 많은 변화를 주고 치셤심부에게도 변화를 주었다. 물론, 이 소설이 실화가 아닌 만들어진 이야기라 실화로 혼돈해서는 안되지만 무척 아름다운 소설인것만은 확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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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훨씬 지난 나이인데도 아직도 삶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나의 꿈이 어떤 것인지 인생은 어떤 것인지 혼란스럽기만한 지금의 나에게 위선과 거짓을 줄이고 좀더 겸손함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충고해준 책이다. 특히 기독교인으로써 이성과 믿음의 혼란으로 힘들어 할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을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비양심적이고 혼탁한 요즘의 세태 속에서 그러한 것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만의 순수함을 간직해야할 것이다. 이 글의 주인공 프랜치스 치셤신부를 바라보며 그가 느낀 청년기의 고뇌와 중국에서의 삶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에게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이들을 수용하는 마음자세... 나 아니면 우리가 아니면 안된다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버리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이나 종교나 나라가 다른 모든 이들을 사랑과 겸손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그런 작은 세상이 우리 주변에 많아지길 바라면서 이 책을 권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책의 작은 단점이 있다면 번역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가끔 나타난다는 것과 다른 출판사의 책에는 나타난 문장 몇귀절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우리가 곧잘 잊어버리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셨고, 오늘날 교회 역시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하기야 오늘날 대부분의 성직자들의 말을 듣는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테지만...... 그것은 확고하게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불교도건 이슬람교도건, 도교의 신봉자이건......선교사를 잡아먹는 무지한 식인종이건......그들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가책이 없는 진실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의 빛나는 자비입니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신은 골수 불가지론자를 만나시더라도 기꺼이 자비로운 눈빛으로 그를 대하시지 않을까요? 그 경우 신은 약간 비양조로 이런 말씀 정도는 하시겠죠 <보아라 내가="" 여기있다.="" 네가="" 그토록="" 믿지="" 않으려="" 한="" 내가="" 네="" 앞에="" 있다.="" 네가=""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천국이="" 여기="" 있으니="" 자="" 들어오너라.="">라고 말입니다.보아라> |
| 아직 어리지만 점점 살아갈 수록 자신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되고, 행불행이 결정되는것 같다. 여기에 나오는 두 주인공들도 그렇다. 프랜치스가 난 결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다른 주인공도... 결국 행불행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달려있는것 같다.다른 사람들이 보는 객관적 행불행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가지나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요즘 나도 이 문제를 가지고 많이 고민한다. 앞으로 내가 할일에 대해서...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 그리고 바르게 사는것인가..? 아직 가치관이 확고하지 않아서 그런지 어떤 결정을 내리고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부모님이 바라는 삶과, 내가 바란느 삶....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바라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지만...문제는 과연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은 어쩌면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으니...그것이 비록 고생의 길이였다 해도 말이다. |
| "천국의 열쇠"는 프랜치스 치셤이라는 인간이 신부가 되는 과정과 신부로서 삶을 보여준다. 소박하며 대인관계에 익숙하지 못한 치셤에 비해 대인관계에 능숙하며 시련없이 평탄한 삶을 사는 안셀모 밀리는 치셤의 어렸을 적 친구이며 후에 주교가 된다. 안셀모 밀리의 삶과 치셤신부의 삶을 대비해 보여주면서, 종교란 무엇이며, 종교인이란 어떠 해야 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명확이 드러난다. 카톨릭 교인인 미세스 글레니, 말캄등의 비인간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반대로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종교에 속하기를 거부하나 중국 오지에서 페스트와 싸우며 희생정신을 보여준 탈록. 사실, 기독교적 종교의 문제를 논할 때, 가장 일반적인 질문은 "과연 소박한 삶을 살면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 사람이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 혹은 탐욕스럽고 온갖 비리를 저지른 사람이 비가오나 눈이오나 교회를 다니며 자신의 죄를 회계한다면 그 사람은 과연 천국의 문을 통과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다. 기독교적 교리에 충실한다면 후자의 사람이 천국에 좀더 가까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진정으로 묻고 싶다. "유실신이라는 기본 교리에만 충실했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신의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가?" 서머셋 모음의 말처럼 신이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신이 말한 것을 자의(自意)대로 해석하고 행동하는 인간에 대해 쓴웃음을 보낼 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의 정체성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신을 믿으며,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라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는 참으로 중요할 것이다. 또한 종교라는 것은 이성적인 문제이기 보다 감성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종교를 이성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종교인들이 해야할 일도 일반인과 다른 선행을 보여줌으로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과 같은 천국을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지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마땅히 가야할 사람이 천국에 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며, 종교란 천국을 더욱 가깝게 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종교의 의미를 너무 가볍게 말한 것일까? 치셤은 중국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카톨릭을 선교하지만 돈이나 자신이 배푼 선행에 대한 댓가로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 오로지 댓가없는 선행을 베풀기만 하는 것이다. 치셤은 말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럿입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단지 천국으로 들어가는 다른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고, 다른이들이 자신들의 믿음의 길을 따라 신앙과 자선을 베푼다면 그것을 받아 들이는 것은 마땅한 처사라고..." 자신의 종교만이 옳다고 다투는 종교인에게 참으로 일침을 가하는 말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라고 한다면 종교란 종교인에게만 국한되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 모두에게 적용되어지는 문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의 열쇠"는 진정한 종교의 의미를 살펴보기에 적당한 책이 아닐는지 싶다. 게다가 유쾌한 의사 탈록, 새침한 베로니카 수녀등 종교를 넘어선 따뜻한 인간애(人間愛)가 책의 곳곳에 있어 절대로 지루하지 않은 책이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책의 말머리쯤에 남긴 노자의 말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 종교는 많지만 진리는 하나이며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