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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가 건설되어 그 운명이 다 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한반도에서는 그것이 오백 년이 아닐까 싶다. 고려도 조선도 그 시간이 지나니 나라가 흔들렸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무혈 건국을 이룬 조선. 그러나 그런 조선도 시간이 지나니 그 운명을 다했는지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흔들렸다. 그 결과 위대한 왕 중에 하나였던 영조는 아들을 죽여야 했다. 그리고 죽은 아들의 아들이 왕이 되었으나 당파싸움은 더욱 심해지고, 결국 한 번 기운 나라의 운명을 정조도 막지 못하고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조선 시대의 훌륭한 왕들과 견줄 만큼 비교되는 영조와 정조. 학창시절 국사 선생님의 이런 말씀에 나는, ‘그들이 훌륭하다면 왜 탕평책이 성공하지 못했냐?’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소설 <목민심서>를 읽으면서 바뀌게 되었다. 이 시대의 인물로 ‘거중기’하면 생각나는 정약용. 내가 관심을 가졌던 두 인물의 등장은 이 소설을 읽고 싶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목민심서>를 읽는 내내 조선 후기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낸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정조와 정약용에게 한없는 안타까움을 느꼈으며 민생보다는 자신의 살 길만 고려하는 벽파, 공서파들의 모습을 보며 지금의 정치와 다른 것이 없구나 하는 시대 한탄도 같이 해봤다. 단순히 국사 시험 대비 공부로 외웠던 정약용, 화성, 거중기, 많은 책 저술의 이미지는 정약용과 목민심서로 내 머릿속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어지러운 세상의 모습은 시대를 막론하고 왜 백성들이 힘들었는지, 일반 백성들에게 열 가지가 넘는 각종 세금과 조세 폐단은 정약용으로 하여금 <목민심서> 저술의 이유가 되었다. 1권에서는 서학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섭렵한 정약용이 서학과 함께 들어온 천주교의 교리와 그것이 하나의 꼬투리가 되어 벽파와 같은 남인 출신의 공서파로부터 끊임없이 공격 받는 모습과 그럼에도 정조가 홍국영에 이어 다시금 총애하는 뛰어난 신하를 아끼는 모습이 보여진다. 그러나 너무 크나큰 사랑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정약용을 고립시키고 결국 정조와 더욱 멀어지는 계기가 된다. 2권에서는 1권에서 잠시 보여준 정약용의 지방관 시절의 모습에 이어 곡산으로 두 번째 지방관 발령을 받고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백성을 다스리며 지방관이 얼마나 많은 폐단을 저지르는지, 저지를 수 있는지를 깨닫고 <목민심서>의 집필의 배경을 보여준다. 3권에서는 정약용과 더불어 정약전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양반으로서 책상머리 공부인 성리학에 빠지는 것과 달리 정약전 역시 수산물에 관심을 보이며 그가 나중에 어산어보를 집필하는 배경이 되는 유배 생활이 그려진다. 3권은 정약용의 유배 생활의 모습이 그려지며 그의 일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이지만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기는 시기가 되기도 한다.
임금이든 신하든 어느 한 쪽이 너무 득세하면 서로 견제하기가 어렵고 결국 그 피해는 모두 일반 백성이 당하게 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시대가 다르다고 변하지 않는 진실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시대의 진정한 리더를 바라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런데 우리는 대통령 하나만을 제대로 뽑는다고 그런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각 지방 도지사, 시장 등.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느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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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세영화가 "국제시장" 우리들 아버지를 만나는 귀중한 시간, 가슴이 먹먹한 소중한 시간, 젊었을때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속에서 나의 의지랑 상관없이 가슴이 먹먹하고 한스러운 안타까움이 지워지지 않는 그런 시간을 만날 수 있는데 오늘 목민심서 하를 만나면 꼭 "국제시장"을 만나는듯한 느낌과 오버랩될 것 같다. 물론 시대가 다르지만 말이다. 약전과 약용의 유배생활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세상이 자신들을 향하여 철저히 외면을 할지라도 그들은 그 곳에서조차 자식을 생각하고 가정을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하고 후대들의 발전을 안녕을 생각하며 지냈던 시간을 만난다. 슬픔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에게라도 있지만 이들 형제들에게 슬픔이라는 단어를 쓰기엔 그 깊이가 너무 달라서 감히 쓰기가 두려울 정도이다.
해배되지 못하고 우이보에(물론 흑산도가 유배지 였지만)서 세상을 떠난(유배 16년 만이다) 약전과 해배는 되었지만 18년이라는 시간을 유배에서 마친 약용이나 형제가 서로에게 애뜻한만큼 읽는 나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여서 눈시울이 뜨거워서 그들이 아플땐 내가 아프고 그들이 서로 그리워할때는 나도 어떡해든 만나게 해 주었으면 좋겠는 조바심이 생기고 그들이 가정을 꾸렸을 때는 그 누구보다도 다행인 마음을 숨기지 못하였다. 각자 책을 만들고 제자를 육성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형제의 삶이 외부에서 보기에는 얼마나 평화로운가 그러나 그 삶은 치열 그 자체였다. 약전이 지었다는 책이 도배지로 사용되었을 때 불같이 화를 내던 약용의 마음이 고스란히는 아닐지라도 나에게 다가와서 피멍처럼 턱하니 숨을 멋게 만들고 그것을 안간힘을 써서 필사를 하는 그에게 감동의 눈물과 함께 이런사람을 어찌 각박하게 대할 수가 있는지 사사건건 앞길을 막을 수 있는지 답답했다.
약전의 죽음이나 약용의 죽음은 하늘도 울었고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의 입에서 탄식이 나오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죄가 없음에도 누구하나 해배에 힘을 쓰지 못하였던 시대가 안타까울 뿐이고 조금만 더 일찍 형제가 권력의 정치의 중심에서 백성을 향한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보다 100년 아니 500년은 더 발전된 모습이지 않았을까하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젊은이들이여 다산 정약용의 형제들에게서 배워라. 제발 배워달라 부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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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佳緣)으로 말하면 정약용에게는 유배지 강진에서 만난, 남포사는 가실이를 이를것이다. 약전에게는 을녀가 있어 그들의 유배지 생활은 고단함에서 다소 벗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요, 또한 다산초당에서의 학문에 집념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제자들 양성에도 마음을 쏟을 수 있었을 것이다. 흑산도 우이보에서의 약전도 을녀와의 가연으로 인해 든든한 힘을 얻었고, 천주쟁이라 하여 핍박하여 피로 받아내었던, 신유사옥으로 인해 잃어버린 두 아들 대신에 새로이 두 아들을 잉태하게 되었으며, 흑산도라는 섬에서만 학문할 수 있었던 기초를 바탕으로 인해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탄생되었으니, 약용과 약전 형제 모두 유배지에 가서도 그들을 괴롭히던 악연으로부터 얽매이지 않고 그들의 학문을 오롯이 펼쳐 내었기에 백성을 위한, 백성의 입장에서 바라보았던 삶의 모습들, 온전히 실학사상을 본보였던 학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초야에서, 유배지에서 오직 백성만을 위한 그들의 목민의 길은 약전의 15년 흑산도 유배지에서의 삶과 약용의 강진에서의 18년의 유배지에서의 삶에서 '자산어보'와 '목민심서'가 나올 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같은 남인으로 이기경, 홍낙안, 목만중 그들이 공서파라는 부류로 나서 정약용이 죽을때 까지도 정씨일가를 그리고 남인들을 죽이는 것에 앞장서게 되었음은 그들 스스로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고 출세를 향한 집념에 사로잡혀서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이기경이 유배지에 갔을 때, 그의 가족들과 이기경 부모의 제사까지도 살뜰하게 돌봐주었던, 정약용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 은혜를 원수로 갚는 그 과정은 참으로 두고 두고 울분을 쌓아놓았다. 그 시대나 현 시대나 비슷한 부류들은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것으로 넘겨본다.
집에 하인으로 있던 천만호일가에게 목화솜을 트는 기계를 개발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천만호가 거상의 꿈까지 꿀 수 있도록 일깨워주었던 정약용에게 천만호는 이기경과는 다른 은혜에 은혜로 보답하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그가 죽을때까지 그의 삶은 오롯이 정씨 가족 정약용의 걱정뿐이었다.
정약용의 일대기를 만나면서 사람과 사람과의 모습들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약용은 특히나 이기경이나 서용보에게만은 용서라는 단어를 생각할 수도 없을만큼 너무나도 많이 당해왔었고 끝까지 괴롭힘을 받아왔지만, 그는 그것들에 대적하지 않고 그의 더 큰 꿈이 목민의 길에 있었음으로 오직 그 길만을 꿋꿋하게 걸었던 그 모습으로, 그 강인함이 있었기에 그의 실학사상은 '목민심서'로 발돋움할 수 있었으리라.
정조와 사도세자, 약용과 약전, 약현과 약종 그 형제들. 그리고 강진 유배지에서 약용을 보살피다 올라온 가실이에게도 질투라는 감정대신 너그러운 안주인의 미덕을 보여준 홍씨, 유배지 강진에서 학문에 집념하도록 보필했던 참으로 이쁘고 재주가 많았던 가실 그리고 그의 딸 비안. 초야에 묻혀있을 때 약용의 벗들인 죽란시사 정약전, 한치웅, 윤지눌, 채이숙, 윤선도의 후손인 윤지범, 이주신, 윤영희 그 소중한 벗들과의 학문의 시간은 목민의 길이 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음이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정약용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했던가, 심지어 은혜를 원수로 갚기까지 나섰던 그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약용의 학문의 집념은 그것들을 이미 뛰어넘었기에, 아니 목민의 길로 이미 들어서서 그것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거대한 재목이었기에 꿋꿋하게 정진하여 그의 모든 생애에서 가장 가치있는 목민심서가 탄생할 수 있었으니, 이는 약용의 집념과 그의 백성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민의 마음이 지극히도 컸던 까닭이다.
한동안은 다산 정약용의 글귀, 마음가짐, 행동들이 그의 삶이 나의 심장을 더욱 뜨겁게 할 듯하다.
소설앓이.....
2015.1.13. 소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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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는 목민관으로 부르는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로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귀양가 있는 동안에 저술한 책이다 여기 <목민심서>는 황인경 작가가 정약용의 일대기를 소설로 완결시켰는데 읽는 내내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길 없었고 가슴이 먹먹하기에 이르렀다. 시대적 배경과 방법만 달랐지 지금의 정치실제와 부패의 극에 달한 사회 상태를 그대로 비춰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백년지계는 교육에 있고 교육의 근본은 修身에 있다는 저자의 머릿말에서의 서두가 많은 생각을 심어준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목민심서>는 상,중,하로 나뉘어 있다
정약용은 16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견문을 넓혔으며 백성의 고초와 목민관들의 부패를 직접 목격하였다 지방 행정의 문란과 부패로 민생의 궁핍한 삶을 보면서도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천 할 수 없었던 안타까움을 책으로 펼쳐내기 시작하였다. 전정의 문란, 세정의 비리, 호적의 부정, 환자의 폐단, 부역의 불공정 이 모든 것이 탐관오리의 온상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정약용은 민본의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어진 관리의 모습으로 백성들에게 사랑과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세력을 쥐고 있는 벼슬아치들에게는 제거의 대상이 되고 만다 왕의 사랑을 제아무리 받는다 해도 그게 오히려 독이 되어 친한 벗들마저 등을 돌리게 되는 상황이 되니 통탄스러울 뿐이다. 결국, 죄없는 죄인으로의 삶, 어처구니 없는 길고 긴 유배생활에서 정약용의 삶의 절정은 펼쳐진다. 자신의 처지에서 충성을 다하는 길은 오직 목민을 위한 글을 쓰는 것 뿐이였다 그것은 학문적 재능과 청렴 결백한 인품이 자연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가는 것과 진배없다 그렇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사무치는 그리움의 대상은 있었다 바로 실학의 선배이자 학문적 스승처럼 의지하며 지냈던 바로 정약전 형님이였다. 형님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나약하게도 하였다가 그 그리움으로 인한 희망이 그를 살리기도 하였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그토록 형제애가 강했다.
모든 학문에 통달한 조선의 천재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마과회통> <여유당전서> <흠흠심서>등등 500권에 달하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썼고 천만호를 위해 솜틀 기계를 고안해 낸 것을 비롯하여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데 필요한 '거중기'를 고안해 내는 천재성을 발휘한다. 목민심서는 정약용이 57세 되던 해에 신유사옥으로 전라도 강진에서 19년간의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중 쓰기 시작하여 풀려난 해인 1818년(순조18)에 완성된 것이다. 부패가 극에 달한 조선후기에 지방의 사회 상태와 정치의 실제를 민생문제 및 수령의 본무와 결부시켜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신유사옥은 조선 말기인 1801년에 일어난 천주교도 탄압사건으로 정약용이 강진으로 귀양을 가게 된 때이다 정약용이 암행어사 생활을 하다보니 목민관들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목격한 후 이것을 바로잡고자 하여 목민심서를 쓰게 된 것이다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와 있는 동안 저술한 '자산어보'의 훼손의 대목에서는 정약용의 그 안타까운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데 정말이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땅을 치고 통곡하듯 울고 싶은 심정이였다. 무식하면 약도 없다더니....
다산 정약용의 삶을 재해석하고 감동적이고 심금을 울리는 세밀한 묘사가 정말 좋다 작가는 무려 10년간의 자료를 수집하여 다산의 일생을 생생하게 재현하였다. 시대를 앞서간 다산 정약용의 감동적인 일대기를 소설로 보여준 값지고 소중한 이 작품의 옥의 티라면 군데군데 오타가 제법있다는 것이다 오타가 제법 많아서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게 참으로 아쉬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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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그의 유배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죄인 신분으로 목민관들을 가르칠 수 없음을 직시한 정약용은 조선의 온 백성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목민관이 해야 할 일을 글로 남길 결심을 하게 된다. 18년에 이르는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고, 그가 후학들을 가르치며 남겼던 이야기들도 인상적이었다. ‘인’이라는 것은 마음가짐이 아니라 행동이어야 한다던 정약용은 후에 추사 김정희를 만나서도 탁상공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그의 형 정약전의 <자산어보>집필과정에 대한 이야기나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요동치는 조선 후기 사회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끄는 이야기는 그의 유배생활이었다. 그는 마음이 울적할 때면 산행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바다가 있었다. 형 약전이 있는 흑산도로 갈 수 있는 그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이 어찌나 아팠을까? 정약전 역시 동생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깊었는데, 해배가 될 조짐이 있다는 정약용의 편지에 그렇게 행복해했건만, 끝내 동생을 만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의 가묘는 고향뿐 아니라 동생이 있는 강진도 볼 수 있게 자리를 잡았다고 하니, 형제의 우애가 얼마나 지극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긴 유배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정약용은 형 정약현을 만나 큰 절을 올린다. 왜 그렇게 그 장면에서 눈물이 나던지…… 열여덟 해 전, 유배 가는 두 아우를 남몰래 배웅하던 정약현에게 절을 올리던 형제지간 중 한 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어릴 적에는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유배생활이 나쁠 게 무엇이냐는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의 눈으로 보는 것과 그 시대의 유배생활은 엄연히 달랐음을 몰라서 그랬던거 같다. 책을 읽으면서도 그의 유배생활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훌륭한 저서를 남기고 백성을 위해 목민관이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했던 그의 마음가짐이 새삼 존경스럽다. 그 후로도 그는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하고,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저서들과 그가 완성한 조선의 학문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때 그가 쌓아둔 경륜을 펼칠 기회가 있었다면 후기 조선사회의 모습은 상당히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역사란 만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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