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김이정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먼 세상을 떠돌았을까? 혹여 '어느 한순간 그의 몸을 관통했을 '눈 먼 각인’ 그 화인을 찾아 떠돈 것은 아닐지. 지난주에 받은 김이정의 소설집『네 눈물을 믿지 마』(강)를 나는 천천히 읽었다. 수록된 여덟 단편을 하루에 한두 편씩, 목차를 벗어나지 않고 차례대로 읽어갔다. 그(이정)가 나를 지칭해서 말했듯이 ‘도반’ 또는 독자로서, 그녀가 소설들에 공들인 품과 궤적을 더듬으며 창작의 고뇌를 같이 느껴보고 싶었다. 각 편마다 배경이 되었던 베트남 인도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낯선 땅, 그의 발길이 닿았던 여행지에 나도 잠시 머물며 호흡과 감흥을 나눠보고 싶었다. 내가 김이정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정홍수 문학평론가가 해설에서 밝혔듯이, '과장 없는 서사, 단정하고 담백한 문체, 절제와 여백의 시적 울림'을 지닌 문장이기도 하지만, 조근조근 풀어가는 서술형 문체가 그의 인품을 닮아서이다. 나는 또 소설 읽는 ‘나쁜버릇’이 도져, 김이정의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는 무엇일까를 찾고 있었다. '리차드 로티'의 말을 빌자면, '언젠가 그의 몸을 관통했을 한순간의 눈먼 각인(Blind Impress)'에 매여 끝없는 벌판을 헤매는 현대인의 불안. 그 불안의 길 위에서 보냈을 창작의 고뇌와 ‘정신의 근육’을 키웠을 지난한 시간들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정신뿐만 아니라 뼛속까지 ‘노마드적 작가정신’으로 살아냈을 발바닥엔 탄탄한 굳은살이 박였을 것이리라. 홀로 계신 노모와 가족의 생계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생계형 작가로서, 그가 떠돌았을 ‘한참 기울어진 세상'의 거리를 재며, 소설을 읽었다. 흐르는 눈물을 꾹꾹 참다 보면 어느 순간 ‘눈물사레’가 들려 폭발하는 경우가 있다. 왜 우는지조차 모르면서 꺽꺽 울음을 토하는 늙은 여자 앞에 소설 책 한권이 놓여있었다. 마지막 8편 <붉은 길>을 끝으로 책장을 덮을 즈음, 내게서는 또 가느다란 한숨이 비져나왔다. 생인손을 앓는 새끼손가락처럼 아픈 소설이다. 등장인물 '너'와 '나'라고만 지칭된 관계. 허겁지겁 떠나온 여행길, 남인도 초원에서 길을 잃은 주인공 ‘나’는 엉킨 실타래를 들고 씨름한다. 왜 그녀는 그것을 싹둑 끊어내지 못할까? 그것의 정체가 무엇일까? 동성애적 사랑, 아니면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온 相憐의 연민, 닿을 듯 말 듯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가느다란 끈 하나로 연결된 ‘너’와 ‘나’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붉은 길"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에 진애(塵埃)가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너'라고 지칭된 그녀의 입술 밖으로 삐져나온 "사람..."하며, 말없음표로 끝낸 그 문장 아니었을까,하는 애매한 의문을 남기며 나는 책장을 덮었다. 소설 속 주인공 ‘나’는 마지막에 헝클어진 실타래를 잘라내고 귀국길에 오른다. ‘퀴어소설’에서도 작가 김이정은 여전히 기품을 잃지 않고 ‘사람’에게로 향한 시선을 남긴 채 끝맺음을 하였다. |
|
온몸을 그을린 채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여자.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자」에 나오는 글이지만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아닐까 싶다. 여덟 편의 작품 중 무려 일곱 편에서 외국이 배경으로 나온다. 관광을 하기 위해 떠난 게 아니다. 계획된 여행도 아니다. 그러니 관광지나 유명한 여행지가 아니다. 갑자기 떠난 그곳은 화장장의 장작불이 불타오르는 인도의 바라나시, 한때 죽음의 도시였던 포르투갈 리스본, 스페인 게르니카, 영국의 황무지 다트무어와 런던 교외, 남인도 뱅갈루루가 주인공이 떠나 도착한 곳이고, 양민학살이 벌어졌던 베트남도 배경으로 나온다. 갑작스레 떠난 곳에서 대체로 50대 중반의 이혼한 여성 주인공은 떠나온 현실을 더 적나라하게 보고 마침내 가장 바닥에 가 닿는다.
-「프리페이드 라이프」: 나이 쉰에 홀로 훌쩍 떠난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선불로 다 써버린 듯한 생이지만 어떻게든 나를 회복하겠다고 중얼거린다. 갠지스강에는 꽃불이 흘러가고, 화장장이 불타오르고, 흰두교 예배 의식인 뿌자를 위한 노랑 조명들이 강물 위로 쏟아져 내린다.
-「하미 연꽃」: 희생자, 한국 군인, 한국 군인의 딸, 세 명의 시선으로 본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
-「죄 없는 사람들의 도시」: 지진과 해일로 죽음의 도시가 되었던 리스본에서 죄 없이 독실하게 살던 엄마가 느닷없이 병원에 들어가 끝내 주검으로 나온 상황에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믿지 마, 네 눈물은 누군가의 투신일지도 몰라」: 파산해 위장이혼하고 고시원에서 지내던 사내가 집에 오자 새로 번호키가 달려 있고 아내가 쓸 만한 비밀번호를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퐁니」: 두 번째 바람이라는 뜻을 가진 퐁니 마을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을 8살 여자아이의 눈으로 본다.
-「노 파사란」: 위장이혼을 한 남편이 죽은 뒤 1년 동안 제대로 울지 못한 여자는 게르니카에서 그곳 여자를 만나 비로소 바닥에 퍼질러 앉아 운다. 나는 갑자기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았다. 무릎 속이, 아니 몸이 텅 빈 듯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 한 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었다. 온몸의 뼈들이 한순간에 내려앉는 기분. 나는 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흐느낌으로 시작된 울음이 점점 거세졌다. 그를 보낸 지 1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제대로 울지 못했던 울음이었다. 어디에선가 솟구친 울음이 종일 걸었던 골목골목으로 번져나갔다. 여자가 옆에 나란히 앉아 나를 안았다. 레이레의 커다란 두 손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너는 울 곳이 필요했구나. 갈퀴 같은 그녀의 손가락들이 내 등의 뼈 하나하나를 쓰다듬었다. (192 ? 193쪽)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자」: 아들은 미국으로 유학 가고 혼자 사는 여자는 위암 2기 진단을 받고 런던 교외에서 혼자 사는 친구를 만나 둘 다 온몸을 그을린 채 세상의 끝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한다.
-「붉은 길」: 남편과 이혼하고 만난 10살 아래 동성 여성이 남인도로 떠난 뒤 여자는 그녀가 있는 곳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뱅갈루루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아쉬람에 돌아온 뒤 그녀의 연락처를 지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