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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학자들은 생태학적 위기가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을 일으켰다고 언급하며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근대 산업문명과 라이프스타일의 전환을 말한다."
“작년(6월 25일)에 돌아가신 김종철 선생(『녹색평론』 발행인)도 근대 산업문명의 대안으로 농적(農的) 삶과 농적 순환사회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비상사태는 생명의 순환, 농적 순환이 잘 안되어 빚어진 것이다. 땅(지구)의 고통은 기후의 역습, 그리고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으로 우리를 엄습해 오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비상상황 속에서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성찰하며 농적 삶을 제안한다” (4~5쪽 여는말 중에서)
기후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후위기의 원인은 총체적이지만 한마디로 요약해본다면 지속가능하지 않게 살아온 우리의 삶의 방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문명의 삶은 지속불가능한 삶으로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생태계를 훼손하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불평등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불평등과 갈등을 일으키는 체제라 할 수 있다.
나는 산업적 생활방식의 대안으로 ‘생명 농업에 토대를 둔 소농 중심의 마을공동체’에 기반하고, 혹은 이를 지지하는 삶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농(農)적 삶(agrarian life)’이라고 칭하고, ‘농적 삶을 위한 사유’를 ‘농(農)사상(농신학, 농철학)’이라 부르고자 한다. (16쪽)
따라서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생명 농업에 토대를 둔 소농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소농의 눈으로 인간과 자연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 (33쪽)
그렇다. 지속가능한 삶의 유일한 대안이 바로 농적(農的) 삶이다. 산업화된 농업이 아니라, 소농이 바탕이 되어 천지만물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과도 순환하는 공동체적 삶이 우리가 지향해 가야할 대안의 삶이다.
우리는 그 새로운 대안적인 문화는 어차피 농적(農的) 문화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 농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모두 실지로 농사를 짓든 아니하든 유기농업을 중심으로 삶을 재조직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36쪽, 김종철 인용글)
세계 5대 곡물 메이저 (미국의 카길과 아처 다니엘스, 프랑스의 드레퓌스, 아르헨티나의 붕게, 스위스의 앙드레).. 이들은 세계 곡물 교역량의 약 80%를 쥐고 흔들며, 전체 유통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다. 특히 카길은 한국 수입 곡물 시장에서 60%를 차지하고 있다. (60쪽)
카길의 목적은... 시장을 개방하여 소농을 몰락시키는 것이다. ... 농업보조금은 ... 소농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국가의 농업보조금이 초국적 농기업들에게 이전되고 있다... (61쪽)
농적 삶은 순환하는 삶이요 지속가능한 삶이다. 그러나 산업화된 농업은 지속불가능한 체제다. 오늘날 농촌문제의 가장 핵심에는 바로 이와같은 자본주의의 무한경쟁이 도사리고 있다. 자동차 수출하고 반도체 수출해서 대기업들 배불리고 거기서 떨어지는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우리의 경제정책이다. 그렇게 수출하는 대신 농산물 수입하고, 그 희생은 고스란히 농부와 농민들의 몫이다. 지금 대한민국 농촌의 현주소다. 정부 당국의 정책이라는 것도 그런 자본주의 무한경쟁 시장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경쟁력을 갖추게 하는 것인데, 그래봤자 경쟁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기조 아래에서 득을 보는 것은 기업농, 산업농, 대농들 중심이고 소농들은 파멸이다. 우리가 지향해야할 대안적 삶으로서의 농적 삶은 이런 산업농이 아닌, 생태농업을 기조로 하는 소농이다.
우리는 산업적 생활방식을 극복하기 위해 소농의 입장에서 신(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존재에 관한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 (92쪽)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인들을 자유인이 되게 하셨다. 구약성서에서 신앙고백되는 하나님은 히브리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분이다. 그런데 히브리인은 특정한 민족 집단을 의미하기 보다는 특정한 사회 계층을 의미한다. 즉 사회의 변두리에 살던 사람들, 피난민, 불청객으로 여겨진 사람들로서 굳이 말하자면 사회의 최하층 구조에 속한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땅이 없는 자, 땅에서 쫓겨난 자, 땅을 가진 자에게 지배당하는 자(노예)들의 고통을 직시하고 경청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자유롭게 하셨는데, 당시 애굽은 왕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계층구조의 사회였다. 즉, 왕을 위시한 지배자들의 호화스런 삶을 위해 희생당하고 착취당하던 맨 밑바닥 계층에 있었던 히브리인들을 하나님은 그 구조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 애굽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청받는다. 구약학자(노만 갓월드)에 의하면, 가나안인이 원래 가리키는 내용은 기득권층에 의해 운용되던 계급적, 공납제적 사회 경제제도이자 정치제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는, 자신들을 착취하고 땅을 수탈하는 지배자와 지배체제를 극복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땅에서, 자유농민으로서 자급자족한다는 의미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하나님이 주신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 농적 삶을 요청받는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까닭은 단순히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끝내는 데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102쪽)
하나님께서 히브리민족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삼으신 것은,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목적 때문이라는 교리적 신앙고백을 따른다면,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바라시는 삶이란 지배와 착취의 불평등한 구조 아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평등한 가운데 서로 상부상조하고 자급자족하는 순환사회 즉 농적 삶을 살 것을 바라신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고백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크다.
이스라엘 백성(농민/농가)은 하나님으로부터 공평하게 분배받은 땅에서 자유롭게 농사(자작·자영·자경)지어 자급과 자족, 자존을 이룬다. 이런 자유농민/농가를 중심으로 자치와 연대, 상호부조를 이룬 부족 연합체에 기반을 둔 삶이 바로 이스라엘이 꿈꾼 이상적 삶이라고 하겠다. 나는 이러한 삶을 농적 삶이라 칭하고자 한다. (106쪽)
8세기에 이르면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사치와 향락을 위해 국제무역에 적극 가담한다. 그래서 그들은 수출 농산물인 포도주와 올리브기름 생산에 유리한 중앙 산간지대를 차지하고, 자영농민의 소규모 토지를 합법으로 가장하여 갈취하고 대토지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땅에 일하는 소작농들에게 단일 재배로 포도주와 올리브기름 생산에만 박차를 가하는 집약농업을 추진하였다. 구약성서학자들은 8세기 예언자들이 활동했던 시대적 상황을 묘사할 때 ‘ 집약농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집약농업이란 농업의 결정권이 농촌(마을)의 자유농민에서 도시의 소수 지배층(부재지주)로 넘어가는 현상을 뜻한다. 자유농민은 자급을 이루기 위해 혼합작물을 재배하는데 반해, 지배층은 국제시장에 수출하기 위해 단일작물을 소작농에게 재배하도록 한다. 이러한 집약농업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은 농촌(마을)의 농부가 아니라 도시의 소수 지배층이다. (114쪽)
오늘날 국제무역(WTO) 시스템 아래 초토화된 우리나라 농업을 연상시킨다. 오늘날의 시대를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라 일컫는 바, 이러한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체제를 멈추게 할 유일한 길은 농(農)의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소농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지속불가능한 신자유주의 자본 산업문명 체제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는 대안적 삶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은 관념이 아니다.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사건을 ‘구원’의 메타포로 본다면, 온갖 불평등과 차별을 토해내며 생태계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기후위기를 불러오기까지 하는 지배-착취의 자본주의 산업문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 농적 삶의 문명을 살아가는 것이 곧 오늘의 현실에서 구원의 삶이라 할 수 있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아 그 어느 때보다 공신력이 실추된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처럼 농(農)의 관점으로 성서를 읽고 세상을 통찰할 수 있다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사회에 공헌하는 교회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워낙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다보니 한국교회가 탈이 많이 났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 에너지를 바른 방향으로 잘 제어한다면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고 통로가 되어, 본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 삼으신 그 목적을 이루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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