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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바닐라> 정한아 저/ 문학동네 2021년 5월 21일 "결혼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결혼이 주는 안정감에 대한 오해와 환상에 대해 파헤친다."
1. 들어가며
결혼한 여자의 삶은 독하면서도 부드럽고,
2. 책 속으로
아이가 잠든 후, 미연은 조용히 책을 덮었다. 문득 스위스의 설야가 떠올랐다. 하얗고 폭신한 눈, 영원히 녹지 않을 것만 같던 눈 덮인 구릉…… 연주는 그때를 떠올리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그제야 미연이 아는 연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들 넷은 잠시 동안 한마음이 되었다. 미연 역시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모든 아름다운 것이 과거에 있다 할지라도.
표제작 「술과 바닐라」는 출산 후에도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분투하는 뭇 여성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설상가상으로 ‘나’에게는 의지할 친정이 없는데, 나이든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 시작한다. 이모님은 ‘나’의 친정어머니보다 가까운 존재가 되어 아이의 성장을 대신 지켜봐주고, ‘나’의 직업적 성공을 함께 축하해준다. 그러나 이모님이 ‘나’의 가정에 편입되어 어머니로서 실현하지 못했던 욕망을 대리 충족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후, 서서히 끓어오르던 긴장감이 한꺼번에 분출되기에 이른다. 나는 저절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감은 채로도 그 향기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은 인공적인 바닐라향이었다. 사람의 체취에 섞여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향기. 내가 아는 사람에게서는 바닐라와 술의 향기가 났다. 달콤하고 시큼한 향기. 나는 율이에게 그 향기를 맡아보라고 했다. 아이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기진의 마음」은 유방암으로 인한 절실한 고통을 가까운 가족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기진’의 소외감을 그린다. 기진의 남편은 그녀를 살뜰하게 간병하지만, 사실 남편의 노력에 기진에 대한 배려는 결핍되어 있다. 오히려 남편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고통과 함께 되살아나 기진을 괴롭힌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기진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은 완전한 타인이면서 투병생활을 함께한 ‘윤’뿐이다. 가족에게 깊이 이해받기를 바라는 기대가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고립감을 겪는 기진을 통해, 소설은 관계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홀로 설 때 비로소 고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고양이는 미소 띤 얼굴로 눈을 감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어떤 번뇌도 없이 홀로 만족한 미소. 그 고양이로 인해 내 인생은 전혀 다른 국면에 이르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새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기쁘면 이야기를 더 하는 사람이 있고, 멈추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다. 2020년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은 친딸에게 안정된 가정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결혼과 이혼, 새로운 연애를 반복하는 어머니상을 제시한다. 딸을 전남편에게로 떠나보내며 어머니로서도 여자로서도 “사랑에 완전히 실패”했다고 느끼던 인물이 버림받은 이웃 아이들에게 문득 애정을 갖게 되는 장면이 따스하다. 「참새 잡기」는 자신을 길러준 할머니로부터 받은 애정의 정체를 확인하고 방황하는 ‘나’의 이야기이다. 할머니는 볼품없는 아버지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희생해왔고, 이제는 ‘나’에게마저 그 희생을 바란다. “아이에 관한 모든 것을 후회”하고 있던 ‘나’는 할머니에게서 정신적으로 자립한 끝에 할머니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이 자기 자신에게도 깃들어 있음을 받아들인다. 한 번도 말할 수 없었다. 항상 딸애를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불의의 사고나 질병이나 아니면 어떤 죽음이 내게서 그 아이를 빼앗아가고 말 거라는 생각에 시달려왔다고. 실제로 그런 상황을 수십 번, 수백 번 머릿속에서 그려보곤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일을 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 한 번도 아이를 위해 나를 내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에 완전히 실패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애를 잃어버린다 해도 할말이 없었다.
어머니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 마음을 정확히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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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아 작가님의 오랜 팬이자,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을 미리 읽기도 했어서 새 소실집에 대해 기대감을 가득 안고 책을 열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다. 그것도 현재 기혼이거나, 결혼을 경험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사는 삶을 경험한 여성이다.
맞벌이를 끝내고 전업주부가 된 미연, 잉글리시 하운드 독 아이를 낳고 시터이모님과 만나게 되는 나, 술과 바닐라 없는 것 처럼 지내오던 친정을 방문하게 된 지은, 참새 잡기 이혼 후 아버지 건물 관리를 하게 된 나,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 이혼 후 요가수련원에서 친구를 만나게 된 다, 고양이 자세를 해주세요 유방암 투병후 친구 부부네 가족가 주말여행을 가게 된 기진, 기진의 마음 유부남과 함께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세희, 할로윈
작품 하나하나는 주인공들이 각자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상황과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지키고 있는 세계의 균열과 불안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의 균열과 불안이 인물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아주 내밀하게 묘사하여 보여주고 있다.
20대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함께 있고 싶었으며, 뭔가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안정되고 정착해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뭔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삶에서 가장 특별한 일이자 나의 삶의 전환점이 되는 일이었다.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이러한 전환점을 겪었으며, 그 속에의 치열하고 치밀한 삶을 보여준다.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과 과정과 고민을 겪은 인물들이 나오면서 소설속에 더 깊이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다.
작가님의 소설을 처음 알게 된 것이 2007년 달의 바다를 통해서인데, 작가님이 어느새 40대의 아이를 키우는 글쓰는 엄마가 되신 것 처럼 도서관 구석에 쭈그려앉아 달의 바다를 읽던 20대의 나도 어느새 한아이를 키우는 30대 후반의 워킹맘이 되었다. 소설보다 더 공감하며 읽었던 부분이 바로 염승숙 작가님과의 대담부분이다. 나 그 자체로서의 나와 엄마로서의 나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와 이러한 괴리로 인한 어려움을 대담을 읽으면서 위로받을 수 있었다.
술과 바닐라 누군가의 생활을 나타내는데 정말 좋은 비유가 아닐까 싶은 제목이다. 독하면서도 부드럽고, 씁쓸하지만 달콤한 삶. 삶은 그렇기에 오늘은 흐려도 내일은 괜찮을 것이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이 그러했듯 내 삶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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