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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서양 문학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과 미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을 기점으로 그들은 그 주도권을 이어받을만한 후대 작가에 대한 갈증을 토로하며 '소설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잠시 숨을 죽이는 듯했던 소설의 부활은 엉뚱한 곳에서 진행되는데. 그곳은 바로 한 동안 서구 열강의 식민지를 거치며 역사적, 언어적, 문화적 혼란을 겪던 라틴 아메리카다. 그리고 그 부활의 중심에 있는 작가가 바로 콜롬비아 태생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다.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와 더불어 쇠락해가는 서구 소설계에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제공한 그는 결국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8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데, 바로 그 수상의 대상이 된 작품이 1967년에 집필된 이 「백년동안의 고독」 이다.
이 작품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해야 할 부분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미묘한 반전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자기 이름을 가진 마지막 후손인 아우렐리아노가 과거 100년 전 멜키아데스에 의해 쓰여진 산스크리트어의 양피지를 해독해 마지막까지 읽어나가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은, 장장 일곱 세대에 걸친 이 집안의 역사가 실제로 작품 속에서 전개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아우렐리아노가 양피지의 기록을 읽어나간 것일 뿐인지 매우 모호하게 서술된다. 이러한 모호한 메타픽션(Metafiction)적 서술은 이 작품의 전반에 흐르는 신비주의와 특별한 주인공 없이 엄청나게 많은 인물의 삶을 비교적 담담하고 건조하게 조명해간 다양한 실험적 시도에 멋진 정당성을 부여한다. 또한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억압과 저항, 주연과 조연이라는 이분법적 도그마(Dogma)가 철저히 해체되었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성격도 매우 강하다.
["나는 리뷰어다"이벤트 참여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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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초는 나무와 연결되어 있고, 종말은 개미들에게 먹힐지니라(p458).
철딱서니 없이 밝게 웃어대는 저 햇살의 볼따구니를 한번 꼬집어본다. 요즘의 나는 추억이 들려주는 메아리로 채울 글밭을 일구기 위한 수고로움을 처절하게 즐기고 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끌어와 경작해볼까. 개처럼 벌어 정승같이 딸자식들 키워낸 내 어머니를 욕보여야하나, 여섯 살 동생이 집에 갇혀 온종일 종이인형과 거울과 대화했다던, 그 눈물 나는 얘기를... 가져와야하나. 여덟 살이던 나, 홀로 시골 외가에서 논일밭일나간 숙모의 한 돌 된 애기보기 삼매경에 빠졌을 때? 학교에서 ‘너그 엄마 주막헌 게 넌 밴드부 못 허지?’하는 담임의 말에 언니가 상처받았을 때? 일찌감치 먼저 떠난 아부지 없는 빈자리 메꾸느라 분주한 엄마, 주막에서 만취한 손님 농지거리에 성내고 있었을 때? 여섯 살 동생, 쇠 문고리에 숟가락 꽂아 잠긴 방에서 온종일 거울 속의 저와 대화를 나누었던 때?
밀란 쿤데라는 이 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까라고 했다. 삶이 소설일진대 소설의 죽음이 있을 수 없음은 너무도 빤한 평 아닌가. 한편 문학평론가 이그나시오 라미레스는 가상만이 아닌 남미 대륙의 고독을 벗어나는 여정이라 했다. 남미혁명과 식민전쟁사의 눈물이 마르케스 시대고독의 대부분이었을진대, 어찌 또 이리 유치한 말을 했을까. 한국의 송병선은 극단적 실험성으로 인해 ‘소설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던 서구 문학계에 ‘소설의 소생’이라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며 쿤데라의 평에 극찬의 쐐기를 박아준다. 그런가하면 식상하지만 개중에 정직한 평을 한 김욱동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을 폭로하는 역사적 소설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뉴스위크는 놀랄 만한 변형의 기적을 이룩한 특이하고 희귀한 마술 도구며 희극적인 걸작이다. 이지적이며 생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이 작품은 모든 것이 효과적이며 기쁨을 안겨준다 했다. 뉴스위크다운 평이 아닐 수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 하지 않던가. 나는 내 생각에 걸어 뇌걸이를 해볼 작정이다. 타이트한 인간상을 개량 모종한 마르케스의 글밭의 배경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시대를 일구어낸 민중의 삶. 그것이 그가 가진 씨앗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리 생각한다. 마콘도라는 지역에 정착한 한 가족이 키운 씨앗이 성장하면서 겪는 온갖 풍파. 100년 세월을 거친 그 우여곡절을 극복한 먹거리가 바로 내 밥상 위에 올라온 것이라고. 그 밥상 위에 올려진 각양각색의 찬들의 파란만장을 보면 나(우리/한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마르케스와 나의 차이점은 양념과 조리법 정도 되려나. 그런데... 찬들이 다 맵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도록. 마술이네 희극적 걸작이네 이딴 거 다 집어치우고 그저 애써 차린 밥상을 물릴 정도로 씁쓸하고 매운 맛에 코끝이 찡하다. 어느 하나 싱거운 찬이 없다.
죽은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느낀 것은 죽음 앞에 서면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사실과 곤충들이 인간에게서 빼앗아가는 이 처참한 낙원을 장차 어떤 다른 동물이 다시 빼앗아가게 될 먼 훗날, 자기들이 이미 죽었더라도 유령이 되어 계속해서 서로 사랑하리라고 굳게 믿음으로써 다시금 행복해질 수 있었다(p454).
개처럼 벌어 정승같이 처자식 키우는 어머니 찬, 집시가 가져온 물건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실험해대던, 말년에 미쳐 밤나무에 묶인 채 죽어간 아버지 찬, 종일 집에 갇혀 양피지 해독에 목숨 거는 아들 찬, 주막(점쟁이/첩) 허는 어매로 인해 바구니에 버려진 아들 찬, 사감호랑이 같은 어머니 감시에 더 미쳐가는 딸 찬, 운수대통 사업번창으로 번 돈 탕진하는 아들 찬, 예쁜 여자와 엮이기만 하면 죽어버리는 사내들 찬, 전쟁터를 휩쓸며 자유당을 저지하려는 대령 찬, 대대손손 다 죽고 다 쓰러진 마콘도... 백 년 세월을 묵고 묵은 만큼 사랑을 나누는 남녀 찬, 그 남녀가 낳은 돼지 꼬리 아기 찬- 지나친 몽환적 비약 같지만 이건 완벽한 현실적 풍자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극치. 돼지 꼬리 신생아의 탄생이 상징하는 바를 사고하는 것이, 오늘의 숙제다. 베끼지 말고 간추리지 말고 느껴지는 대로 가슴에 품자. 설령 백 년이 걸리더라도... 고독이란... 그리 간단명료한 물음이 아니기에.
100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없다(p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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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접했을때는 어떤 방식으로 읽어 나가야할지 정말 난감했다. 처음에는 다른 소설처럼 일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작품 초반에 날아가는 양탄자를 읽고 나서는 내가 과연 잘못본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얼마동안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모두 읽고 난뒤의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작품세계를 알았을때 당연한 표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런 신비적인 표현 방식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어쩌면 끝까지 읽지 못했을 듯 하다. 왜냐하면 평소에도 자유파, 보수파 등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나였고 근친상간, 전쟁 등에대해서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않은 분량인 백년동안의 고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신비적인 표현력과 더불어 등장하는 부엔디아 집안의 사람들뿐 만아니라 마콘도에 최초부터 살아왔던 여러 인물들의 개성 넘치는 특징때문이었다고 할 수있다. 부엔디아 집안이 완전히 몰락해 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우르술라라는 인물을 통해 단 몇문장으로 다시 부활하는 부엔디아 집안을 보여주었고 4년 11개월 2일동안 계속된 비로 인한 장마 속에서도 마콘도의 토착민인 아랍인들과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의 정부 페트라 코테스의 끈질긴 생명력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또한 폐쇄적이고 절차와 격식을 중요시하는 페르난다와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추구하는 우르술라의 대립은 굳이 보수와 자유라는 어려운 단어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단지 문을 열고 닫는 일상적인 행동으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 었다.
솔직히 난해하다고 하면 그렇게 말 할수있는 백년동안의 고독을 아주 오랜시간동안 조금씩 읽어서 그런지 작품 전체를 통해 작가가 말하려는 의도를 정확히 파악은 못했지만 군데 군데 등장하는, 위에서 말한건처럼, 그런 인물들을 보면서 책읽기를 그만둘듯 하면서도 결국은 끝까지 읽게 만드는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상상력이 감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백년동안 부엔디아 집안에서의 반복되는 이름들을 그들의 인생을 예측할 수 있게하는 중요한 단서였고 또 그렇게 되어가는 그들을 보는 것이 이책의 중요한 묘미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주의깊게 읽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직도 의문나는 것이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그의 쌍둥이 형제 호세아르카디오 세군도의 무덤이 바꾸어 묻혔다는 부분에서 어릴때부터 역할 바꾸기 놀이를 좋아했던 이들둘은 부엔디아 집안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때 그당시 이미 이름을 바꾸어 죽을때까지 다른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던게 아닐까,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이름이 있는 무덤으로 찾아 들어간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인상깊은구절] 페트라 코테스는 그 당나귀를 자신의 분노를 먹여 키웠다. 그리고 건초와 옥수수, 풀뿌리 등이 완전 고갈되어 더이상 먹일게 없었을 때는 당나귀를 자기 침실로 데려다 놓고 무명 셔츠와 페르시아산 양탄자, 플러시천으로 만든 침대 덮개와 벨벳 커튼, 그리고 금실과 은실로 수를 놓은 호화로운 침대의 지붕을 뜯어먹이로 삼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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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과 같은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G.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소설이 어떨 때 재미가 있는가?” 하고 물으면 나는 “작가는 심령술사가 되어서 독자를 자신의 상상의 세계로 빨아들이고, 독자는 체면에 걸린 사람처럼 빨려들어 갈 때이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허구가 어떠한 방법으로 사실과 결합해서 소설이 허황하게 되는 것을 막아주는가와, G.마르케스는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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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안정효 번역가와 고전에 대한 믿음으로 선택한 이 책은 초판이 1977년에 나온데다 내가 산 것은 올해 2011년 3판 15쇄다. 중간에 다른 책들과 함께 읽어간 덕에 7월초에 시작해 9월 하순에 마쳤으니 일단 집어들면 재미있게 읽히긴 하지만 두께 때문인지 다른 책을 읽다보면 선뜻 집어들지는 않게되는 양면성이 있었다. 게다가 처음에 한 문장이 한 페이지를 거의 차지하기도 하고 한 단락이 두어페이지에 걸치는 글쓰기를 따라가기엔 조금 긴 숨이 필요했다. 아주 옛날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 이구아란이 숲속에 마콘도라는 마을을 세우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동네가 번성하다가 이윽고 사람들도 떠나고 마지막 남은 후손도 바람에 날려가고 개미가 물고가 다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고 마는 책의 전체 줄거리에 그 사이사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낳고 이웃들이 등장하며 마치 구약의 창세기 같은 분위기라 읽다보면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그 사람 같아 헛갈리긴 했지만-게다가 이름도 비슷비슷하다- 사람이 하늘로 사라진다던가 나비가 특정인을 뒤따라 다니고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태어난다거나 예언서에 적힌 것들이 100년후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마술적인 이야기가 이 책을 읽다보면 너무나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만큰 이 책의 저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뛰어난 이야기꾼이기 때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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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의 저널리스트이자 노벨상을 받은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소설 『 백년 동안의 고독 』을 다음과 같이 끝 맺는다.
"그는 이제 예언을 앞질러가기 위해
다시 몇 장을 뒤로 넘겼으며
자신이 죽는 날과 그때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마지막 구절을 읽기도 전에
그는 자신이 그 방에서 영원히 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즉 이 환영의 도시는 바람에 휩쓸려갈 것이며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양치지의 해독을 막 끝내는 순간
인간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고,
양피지에 쓰인 모든 것은
영원으로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절대로 반복될 수 없는 것이니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언도받은 집안은 그대로 지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다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백년, 정확히 140년간 마콘도라는 곳으로 이주하게된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고독함을 이야기하려 한다.
독특한 어느 부부의 이야기에서 시작한 이 가족史는 때로는 몽롱한 환타지와 처절한 사실주의를 오가며 마콘도라는 마을과 그들의 나라의 역사를 배경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들이 가졌던 지식과 추억, 존경과 멸시, 슬픔과 고독은 그들의 마을 마콘도와 함께 점점 더 철저하게 잊혀지고 사라져 간다.
부엔디아 家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런 비범한 고독함 속에서 삶을 살고 마감하며 사랑과 性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도 특히 근친상간의 모습으로... 고독한 존재인 그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기대한만큼... 즐거움을 가져다준 소설이었다.
몇가지 떠오르는 생각들.. 정말 작가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란 회전하는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반복되는 것일까.. 우리의 기억과 역사라는 것은 단지 임의로 선택되어진 사실들의 집합인 것일까..
그리고.. 삶이란 정말 그렇게 지독하게 고독하고 또 허무한 것일까.. [인상깊은구절] "이 집안 최초의 인간은 나무에 묶이고, 마지막 인간은 개미에게 뜯어먹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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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읽어온 책 중에 가장 비현실적인 소설이었다. 공상 소설은 그저 현실과 괴리된 허구임에 그저 공상으로 받아들였다 치지만, 이 소설은 데자뷰를 겪듯 몽롱한 현실 체험이었기에 더욱 혼란스럽다.
한 시간에 백페이지를 읽는 속도는 어디가고, 단어 하나, 글자 하나에 영혼을 새기듯 읽고 있다. 그래서 더욱 괴롭다. 지금, 6대에 걸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의 2대의 역사가 끝나가는 부분을 읽고 있다. 다 읽은 후 리뷰를 담기 전, 지금까지의 감상을 담아두고 싶어서 감히 리뷰를 올리는 것이다.특히 17대 총선을 엊그제 겪은 대한민국의 유권자였기 때문일까.
2세대 주인공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보수파에 대항해 싸우는 자유파의 핵심 인물이다. 아우렐리아노의 아버지는 이 소설의 무대인 마콘도를 정통 사회주의(우리 시대의 말을 빌리자면) 국가?로 일군 당사자이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일조권을 누릴 수 있도록 주택계획을 하고 경작지를 골고루 나누는 등...
그 평화롭던 마콘도에 절대 필요없을 것 같은 행정군수가 발령을 오고, 외부 세력이 침투하면서 마콘도는 서서히 갈등의 무대가 된다. 마콘도에서 선거가 실시된다. 자유파와 보수파는 각기 다른 색의 투표용지. 장인이 자유파 투표용지를 불태우는 것을 보고 그저 '이건 아니다'라고 튀쳐나가 자유파의 편에 서 싸운다. 아우렐리아노는 종국에 가서는 폭력을 절대가치로 여기는 폭군이 되었다가, 무한한 고독에 고립되는 인간전형을 보여준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지금 우리 사회는 새로운 진보세력이 제도권 안으로 유입되었다는 것에 우려와 박수의 목소리가 엇갈리고 있다. 단지 3%에 불과한 그들이 과연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 그저 새로운 세력의 출현에 과도하게 떨고 있는건 아닐까? 어떠한 정당의 소속이건, 그들은 국민을 대신해 대의정치를 펼치는 존재일 뿐이다. 그 사실을 국민은 모두 알고 있는데, 국회위원들 자신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우렐리아노의 종말을 통해 우리 국회가 동아줄을 잡게 되길 바란다. [인상깊은구절] 그것은 곧 보수파 정권이 옳음을 인정한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당신이 말하듯이 그러한 수정작업을 통해서 민중들에게 호응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현정권이 국민들 사이에 더 깊이 뿌리르 박게 된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국민이 바라지 않는 것들을 앞세우며 싸워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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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윌레 소잉캉의 <해설자들> 을 읽고 쉽게 체감되지 못했던 그 아프리카의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말미암아제 3세계문학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 또한 오리엔탈리즘으로 판단하자면 제 3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물론 제3세계라는 말이 냉전의 축으로 해석컨대 자본주의세계와 공산주의세계로 나누어 생겨난 용어이지만 우리의 정치적 현실 또한 영미문학세계엔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엔 따분하고 낯선 이야기 일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애이프리카 와 싸우스 어메리카의 문학은 선뜻 손에 쉽게 잡혀지 않았다. 니도 그렇재? 그렇다면 가브리엘 마스케스 (또하나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어라. 그의 문학 전편에, 곳곳에, 틈틈히, 구석구석, 치열하게 현실적인 의식이 비유되어 녹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독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이 작품이 탁월한 것은 그 환상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채색화 된, 우화화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집안을 통해 그 삶의 소사들을 무덤덤하게 그리고 있는 소재에 깃든 남미의 현실인 것이다.
바나나 농장의 대학살이 정보의 빈곤에 시달리는 일반 대중들에겐 정부가 그런일이 없었다고 공표 하는 것만으로 대학살은 “일어나지 않은일” 로 여겨지는 점이나, 마약/섹스/ 쾌락으로 단면적이나마 묘사되는 이문화의 개입에 대책없이, 비판없이 당하고 있는 문화적 정체성의 고갈을 이야기 한 점이나, 신문명을 공부하고 온 아마란타 우르술라가 마지막으로 마콘도를 예전처럼 불러 일으키려고 하지만 결국 피폐화된 마콘도는 버려진 땅이 되버린 현실은 정말이지 남미의 다큐멘테리 아닌가? 이 방대한 작품이 진지성만을 무기로 삼고 있었다면 이걸 권하지도 않을 뿐더러 나 또한 제대로 읽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케스는 외모와는 다르게 매우 뛰어난 문학적 위트를 뽐 내는데. 어설픈 말장난의 유머에 익숙해진 본인에겐 유머의 진정한 맛을 느끼게 해주더라 이말이다..
100여년동안 계속되는 근친상간으로 인해 돼지꼬리 달린 인간이 탄생될 것이라는우르술라의 지속된 우려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으로는 온전히 태어나나 영혼엔 지독한 고독이 배기게 된다. 그들의 고독은 이름에서 비롯되는데 30명이 넘는 등장인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은 호세 아르카디오 아니면 아우렐리아노이다. 나중엔 아우렐리아노를 가진 남자가 무려 17명이나 나온다. 이 반복되는 이름은 고독을 타고나는 운명인 것이다. 결국 그들의 고독의 역사는 마지막으로 이모와의 근친상간을 통해 돼지꼬리를 가진 아기가 태어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고 집안의 파멸을 예견하는 아이콘인 벌레에게 잡히먹음으로써 부엔디아 집안은 끝난다. 마르케스는 천재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지금 말하고 있잖니" 우르술라가 외쳤다. "할머니는 말도 하지 못해' 아우렐리아노가 말했다. "마치 작은 귀뚜라미가 죽은 것 같아" 그제서야 우르술라는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누가 말했던가.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인 고독을 가지고 산다.그것은 주체가 인간이라는 바로 그것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짐지어야만 하는 자신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 그것을 쉽게 인정하려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타인이라는 환각에 빠짐으로써 자신의 근원적 고독을 망각한 채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그러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이들은 그들이 어떠한 한 부분이라도 훌륭하다면(?) 고독을 고집하며 산다.. 그들은 자신을 절대 망각하지 않으려 하며 오히려 강하게 자기 자신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마지막에는 타락해버리고 말았지만.. 이토록 방대한 스케일의 소설을, 이토록 꾸준히 한 가지를 일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혀 다른 모습인 것처럼, 전혀 다른 개성을 끌어내어 보여줄 수 있는 작가가 과연 몇이나 될까.. 환상과 현실은 과연 어떠한 것이 정말인 것인가.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와도 같은 마콘도의 존재.. 이 책은 누가 읽으며, 어느 순간에 읽느냐에 따라서 항상 다른 맛을 보여준다. 마치 순간 순간마다 그 향이 변하는 향수와도 같은 매력을 이 책은 가지고 있다. 단연코 내 생애에 최고의 소설중 하나로 추천하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생기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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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글이고 안정효 선생님이 번역한 책이라 조금의 의심도 없이 책을 들었다. 마콘도라는 파라다이스같은 부족의 백년생을 그린 소설이라는 소개에 호기심이 자극되었고,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최초의 마콘도는 무릉도원같은 곳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현대문명이 소개되고 쾌락을 알게되고 돈을 알게되면서 마을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죽을 때까지 부엔디아집안의 대를 이으려 애썼던 우르슬라의 노력도 헛되게 그녀의 예언대로 근친상간으로 돼지꼬리를 단 아이가 태어나는 순가 마콘도는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무서운 사실은 멜뀌아데스는 이 백년동안 마콘도에서 일어날 일들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그 사실을 양피지원고에 남겼고 부엔디아집안에서는 끊이지않고 그 양피지원고 해독에 몰두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까지 그 해독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마콘도는 파멸로 갔는지 모른다.
문득 생각이 든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도 어쩌면 양피지원고에 적혀있는 대로 가고 있을지 모른다. 세상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그래서 그 길을 고쳐잡을 수 있었던 몇 번의 기회(양피지원고해독에 몰두했던 사람들이 있었듯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몇번의 기회가 더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세상의 파멸을 막을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하지 않을까. [인상깊은구절] 순간적으로 자기의 영혼이 그토록 엄청나게 무서운 과거를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기 자신의 향수와 남들의 향수가 찔러대는 필사적인 창 끝에 상처를 입은 그는 말라죽은 장미숲을 얽은 거미줄을 끈질김과, 독보리풀의 참을성과, 찬란한 2월 새벽 하늘의 인내심을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갓난아이를 보았다. 온 세상에서 다 모여든 듯 바글바글한 개미떼가 정원의 돌길을 따라서, 바짝 쿨기가 빠지고 껍질만 자루처럼 붕싯하게 부푼 아기를 끌고 그들의 굴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기막힌 장면을 보는 순간, 그는 공포에 질려 몸이 굳어지는 대신, 멜뀌아데스의 마지막 비밀을 깨달아 그 양피지 원고에서 인간의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가리키는 글귀를 터득하게 되었다. '역사의 시포는 나무와 연결되어 있고, 종말은 개미들에게 먹히울지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