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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작은 이야기>라는 말로 우리들에게 가까운 저자의 책을 만나게 되었다. 사소한 배려나 따뜻한 온기로 세상을 살맛나게 만드는 일을 하기를 기꺼워하는 저자의 모습이다. 쉽게 바뀌어 지지 않을 차가운 현실 앞에서 미약한 힘으로나마 우리가 서로를 도울 수 있기를, 공감과 연민을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하는 저자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에세이다. 많은 글들이 작은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내용이 격랑을 얘기하는 것은 별로 없다. 폭풍우가 몰려오고 거대한 파도가 치며 해일이 일어나는 그런 이야기들은 적다. 하지만 이야기들이 잔잔한 가운데 따뜻함이 스며, 세상을 밝게 채색하게 만들어 준다.
내용
글들이 참 따뜻하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 그려진다. 아픔을 곱씹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물 한 잔, 조그만 배려 하나가 위로가 된다. 말 한 마디 들어주는 것이 힘이 된다. 그런 이야기들이 산재해 있다. 정말 글 속에 들어가 있다 보면 마음이 흐물흐물 녹아 흐를 듯하다. 사람과 배려로 완전히 무장해제를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글은 6장으로 그려진다. 각 장에는 소제목을 붙여 놓고 있다. <별 것 아닌 선의>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 <타인의 고통을 마주 할 때> <다가감을 멈추지 않기를> <삶이라는 투쟁담> <생의 반짝이는 순간> 등으로 나뉘어 있다. 각 소제목에는 7-12개의 글들이 나열되어 있다. 각자 소제목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들로 묶었으리라. 모두 잘 읽힌다. 그렇게 힘들게 읽지 않아도 되고, 이해하려고 머릴 싸매지 않아도 된다. 마음 따뜻하게 읽혀져 나간다.
지친 몸을 잠시 의자에 누이도록 해준 것은 특별히 선하거나 자비롭지 않은 한 인간이 건넨, 별것 아닌 호의였다.
책에는 50여 편의 별 것 아닌 호의가 담겨져 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있다. 빵을 주문해 놓은 어떤 사람이 빵을 찾아가지 않아서 빵집 주인은 성이 났다. 그리고 전화기에 대고 이죽거렸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나니 그 성을 낸 것이 오히려 미안했다. 그들은 생일 케이크를 주문해 놓고 그 생일의 주인공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것이다. 그들에게 그 소식을 알았을 때 빵집 주인은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성을 냈던 자신을 돌아볼 밖에.
빵집 주인은 가게를 찾은 아이를 잃은 부부에게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냥 따뜻한 물과 롤빵을 조금 내어 놓으며 “내가 만든 롤빵을 조금 드시지요.”“이럴 때는 뭘 좀 먹는 것이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렇게 별 것 아니지만 접시에 놓인 빵을 하나씩 주워 먹는 그들을 보는 빵집 주인과 그들 사이에 큰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까지 거기서 일했던 분은 내 또래로 짐작되는 여자 점원이었다. 바쁜 시간대엔 아르바이트생과 함께였지만 아침에는 주로 그분 혼자 가게를 지켰다. 새침한 첫인상에 불필요한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면 주문하기도 전에 늘 먹는 대로 ‘샷 추가하고 물 적게 넣은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주었다.
익숙함이 같은 편리함을 말해 주고 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시간의 선물’을 얘기하고 있다.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익숙함을 잘 그려내고 있다. 나도 이런 경험이 있다. 나는 꽤배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 집에서도 모두 안다. 그래서 가끔 밖에서 들어올 때 내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이 필요하면 꽈배기를 사온다. 우리는 공히 어떤 집을 통해 자주 구입해 먹는다. 그 집에 가면 젊은이가 어머니의 사업을 물려받아 장사를 한다. 나를 알아본다. 그리고 바로 주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일정한 양과 종류를 봉지에 넣어 내놓는다. 나는 다른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 익숙함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일 게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그 익숙함에서 다시 낯설음으로 나아갈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참 많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놓고 있는 책이다.
청소년기에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친구 어머니는 직접 구운 당근케이크와 우유를 간식으로 내어주셨고, 맛난 샌드위치를 만들어 내 몫까지 싸주시곤 했다. 그분은 내게 자애로운 모성의 표상이었지만, 그날 그 보육원 모임 분위기만큼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곳 원장님이라던 사모님이 ‘여기 사람들은 가난해서 악이 가득 들어차 있으니 기도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이 보육을 해도 되는 건지 반발심이 솟구쳐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뵌 친구의 어머니에게 죄송해서 눈치를 살피던 중, 뒤편에 앉아 있던 수녀님이 시선에 들어왔다.
원장의 선민의식은 일반인들이 들으면 참으로 역겨운 것이리라. 거부감이 가득 느껴지는 말을 들으면서 화자는 힘겨운 시간을 친구의 어머니 때문에 참고 있다가 수녀님을 만난다. 수녀님이 왜 거기 와있을까 생각을 하는 사이에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나는 수녀님에게로 거부감 섞인 눈을 보냈다. 그런데 그 눈은 분명히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건만 시리도록 투명했다. 수녀님은 권력, 지위, 욕념 등과는 상관이 없이 여기에 있는 듯했다.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단단한 내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앉아 계실 수 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내 거부감, 자의식 등이 한 순간에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모임을 마치고 수녀님이 나를 보더니 기도를 좀 해주고 싶은데 괜찮으냐고 물었다. 주위에서는 수녀님이 치유의 은사를 맡은 분이라고 저 학생이 행운아라고 했다. ‘은사’가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따스한 손이 얹히자 차갑게 비웃던 심장에 뜨거운 것이 쿨렁하는 느낌이었다. 모르긴 모르지만 무엇인가 받긴 받은 모양이다. 따뜻한 마음, 작은 선의가 만나는 세상을 살아갈 맛이 아닐까 여겨졌다.
일전에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은 여태껏 생의 지향점이 뚜렷하진 않지만 좋아하는 영화나 만화, 사람, 혹은 대화 방식 안에 있다고 일관되고 고유한 무엇이 있다는 걸 안다고. 그렇기 때문에 비록 현재가 불안할 지라도 삶 자체는 신뢰한다고 말이다. 내가 매료되어온 이야기들의 일관되고 고유한 무엇은 ‘작은 사람이 때어놓는 발걸음’이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채 그럼에도 매일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도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스토너는 수업에서 처음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읽고 세상이 다른 빛깔로 반짝이는 강렬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의 삶을 결정지었다. 하지만 그가 빠진 사랑은 일방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느낀 것을 타인에게 잘 전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또 연구하고 교육하면서 살아간다. 자신이 느꼈던 빛깔이 자신이 얘기하려면 차갑게 식는다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스토너도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래서 고민이 구부정한 어깨만큼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일을 매일 해나가면서 일상을 이어간다. 약 4백 쪽에 달하는 이야기는 그러한 일상의 연속이다. 저자는 큰 결실을 맺지 못한 노력들이 누적된 사람들, 그것이 큰 감동을 주었다고 얘기한다. 스토너의 삶이 실패담이 아닌 삶이라는 투쟁담으로 읽힌다. 즉 자잘한 삶의 일상, 그 속에서 큰 위안과 삶의 질서를 보고 있는 것이다.
<웃음 한 조각> <따뜻한 무언가 내면에서> <삶이라는 투쟁담> <오백 번 넘어지더라도> <세심증을 앓는 그대에게> <찰나의 선의> <단 한 번의 글쓰기> <가벼워지는, 혹은 무거워지는> <내가 나여서 좋았던> < 시간의 선물> <밀알만 한 쓰임새라도> 등의 글의 제목들이다. 글들이 낱낱이 분리되어 있어 읽기도 편하다. 구태여 한꺼번에 읽을 필요도 없다. 더러는 안 읽어도 된다. 제목을 보고 마음에 오는 것부터 읽어도 된다.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지는 글들이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사랑이 된다. 행복이 뭐 별 게 있느냐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각자의 곁에 행복이라는 게 항상 머물고 있다고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글들을 읽으면서 이만큼 위로를 받았으면 되지 또 뭐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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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잔잔한 위로를 전하는 선물이다. 선물은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타인으로부터 전해지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위로를 받을 준비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 준비한 만큼 배려가 나타난다. 그 배려는 타인일 수도 있고, 정치 제도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다. 그들과 더불어 고운 마음들을 만날 수 있는 언어들이다. 그 언어에 각자의 향을 담아 허공에 연을 띄울 수도 있을 게다. 그러면 그 배려는 민들레 홀씨처럼 곳곳에 다가가 속삭일 게다. 그 위로를 나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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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연히 읽은 저자의 글에서 ‘6강당’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에 건물이 몇 개 없을 때 건물마다 번호를 붙였는데, 당시 유일한 강당이 6건물에 있었다. 암호 같은, 하지만 단번에 과거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그 말 때문에 저자와 인연이 닿았다.
간혹 연구하는 내용에 대해 쓴 글도 있지만 그의 글은 대체로 일상에 머물렀고 소박하고 따뜻했다. 특별히 눈길을 끌만한 내용은 아니어서 읽기도 하고 때로는 건너뛰기도 했다. 어느 날 신문에 쓴 칼럼이 올라왔다. 첫 번째 칼럼을 읽고서 조금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학교수로서 사회 현안에 대해 발언한 것이 아니라 여느 때처럼 마음을 따라 쓴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책 출간 후 가진 인터뷰에서 “치열하고 심각한 사회 현안이 하루를 멀다하고 신문 지면을 뒤덮고 있는데 내 글 하나 덧붙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다”고 했는데, 아마 내 생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 저자 스스로 밝힌 것처럼 ‘별것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했고, 지금까지 잘 이어왔고, 이렇게 <별것 아닌 선의>가 되어 나를 찾아왔다.
한동안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 깊이 관심을 두었다. 법적인 문제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어서 몇 가지 쟁점에 대해 그의 견해를 물은 일이 있었다. 격식을 갖추지 않은 질문이라 결례로 여길 수 있겠지만, 그의 글에 비친 심성으로 미루어 질문을 야박하게 내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사 중이어서 메시지를 늦게 읽었노라며 찬찬히 읽고 답을 해도 괜찮겠는지 물어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서 그가 쓴 칼럼을 읽었다. 그리고 얼마나 미안해했는지 모른다.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어떤 어둠으로 다시 돌아갈까 두렵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품에 안아 험한 고비를 건네주셨으면 좋겠다고 고백할 만큼 절박하다고 했다. 그리고 힘과 위로를 받아 마침내 두 발이 닿게 될 그곳이 지상이기를, 그래서 그 단단한 땅을 딛고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난 후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가슴앓이를 그의 공간에 털어놓았다. 사실 그동안 그가 써온 글이 소박하고 따뜻하기는 했지만 늘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고 언뜻언뜻 아픔과 고통이 비치기도 했다. 혹시 내가 과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행간에 비쳤던 그늘의 시선으로 읽었을 때 그의 글이 더 선명해지는 걸 보면서 짐작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고백을 듣고 돌이켜보니 그렇게 꼭꼭 여몄으나 그럼에도 온전히 감출 수 없던 내밀한 고통을 이제는 모두 내어놓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애도하고,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은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는 책에서 시종일관 ‘별것 아닌 한 마디’가 누구에겐가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자기 기억을 풀어낸다. 그의 글을 따라가다 나 역시 그런 일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 되돌아보니 뜻밖에도 악의 없이 내던진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 큰 상처가 되고 결국은 그것이 나를 겨누는 비수로 되돌아와 애써 얻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일이 먼저 떠올랐다. 그보다 오래 살았으니 허물도 그만큼 많았을 것이다.
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크고 작은 자비가 자기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중에는 특별히 자비롭거나 선하지 않은 한 인간이 건넨 ‘별것 아닌 호의’도 들어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에게 건네진 호의가 별것 아니었다는 말이 아니라 별것 아닌 호의조차도 누군가에게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찰나의 선의는 설령 위선일지라도 그 자체로 귀하다고 말한다. 선의 하나가 더해진 세상은 그것마저 없는 세상에 비해 그만큼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에게 나누어진 모든 자비를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기말시험을 앞두고 초조해 하는 자기를 위해 없던 보충수업을 자청한 학원 교무주임 선생님의 배려와, 제자의 기쁨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려고 팔불출이 되기를 망설이지 않으셨던 지도교수님 격려와, 연하장의 쓸모를 생각해 굳이 비싼 특급으로 보낼 필요 없다고 설명해준 우체국 직원의 친절을 고마워한다. 그리고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몸에 좋다는 영양제를 사들고 찾아온 학생을 통해 도둑처럼 찾아온 위로 앞에서 손윗사람의 표정과 자세로 아이처럼 운다.
그런 그가 받기만 했을까. 지도하는 학생의 어두운 표정을 놓치지 않고 듣는 귀가 되어준 것을 기뻐했고, 베로니카라는 세례명을 가진 그가 수능을 앞둔 학생이 함께 절에 가기를 청하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서 부처님께 배례하고, 그 모습을 좋아라 하는 학생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모두 용서하셨을 거라고 의심 없이 단정 짓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유학생활 가운데 자기 생일을 위해 주머니를 털었던 친구에게 맛있게 먹고 밝아진 표정 대신 값싼 메뉴를 고집하는 것으로 보답하려 했던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당시 자기가 표현해야 했던 것은 친구가 지불한 시간과 돈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그것을 아끼지 않은 마음에 대한 고마움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모습은 그의 따뜻한 심성에서 배어나왔을 것이다.
오래 전 열반에 든 성철 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법어를 남기셨다. 산은 내게도 산이고 물은 내게도 물이겠지만, 그 산과 그 물이 깨달은 자의 눈에 비치는 산과 물일 수는 없는 일이다. ‘별것 아닌 선의’에 감사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감사가 일상인 사람의 감사와 마음이 부서지던 순간, 생을 그만두고 싶던 과거 어느 순간, 가족과 절연하며 살아온 긴 시간을 돌고 돌아와 드리는 감사가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처음 찍었다는 그의 인터뷰 영상을 몇 번 돌려보았다. 그러면서 이제는 생각을 입 밖에 내는 일에 조심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그를 그저 연차 높은 대학원생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충분히 깊었고 그의 모습에는 품위까지 실려 있었다.
그런 따뜻한 심성을 가진 그에게, 무엇보다 내 보배와 같은 두 손녀를 이름으로 기억해주는 그에게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임하기를 소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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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행동을 위선이라고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착한 척한다, 가식 떤다 같은 말도 자주 쓴다. 위선이고 착한 척이고 가식일지라도, 그런 위선이나 착한 척, 가식조차 떨지 않는 사람보다는 그거라도 하는 사람이 나는 훨씬 좋다. 기왕이면 상대방을 배려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 그런 사람이 적은 세상보다 훨씬 살기 좋을 거라고 믿는다. (이렇게 쓰고 있는 나도 위선조차 떨지 않는 때가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착하고 매너 좋은 사람들을 존경한다).
"착한 척한다고 비난하면 달게 받겠다. 나는 냉소보다는 차라리 위선을 택하려 한다."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에서 법학을 가르치는 이소영 교수의 책 <별것 아닌 선의>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2017년부터 <경향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 자신의 삶에서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준 타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대학 시절 입시학원에서 강사 아르바이트를 할 때 시험 전날인데도 특강을 하러 출근해야 했던 자신을 배려해 준 교무주임 선생님과의 일화부터, 저자가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부러 연구실로 찾아와 영양제를 선물하고 간 제자와의 일화 등 가슴 뭉클한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크고 작은 선의 또는 호의가 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저자만 해도 결코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와 명예가 보장된 사법고시 대신 학자의 길을 택했지만,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믿고 지지해 준 교수님들과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현재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다. 비혼 여성 1인 가구이며, (아마도) 연고가 없는 제주에서 살고 있고, 완치가 쉽지 않은 병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데도 저자가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건 그동안 사람들과 주고 받은 선의의 또는 호의가 넉넉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럽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때로는 어떤 이유로 울고 있는 저자를 위해 위로가 되는 음악을 틀어준 택시 기사, 내가 좋아하는 음료를 기억해 주고 알아서 주문해 주는 카페 점원,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하자 자기 일처럼 나서서 찾아준 우체국 직원 등도 잊을 수 없다. 이들은 자신의 직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아주 잠깐 저자를 만났을 뿐이지만, 업무가 요구하는 수준 이상의 배려를 저자에게 베풂으로써 저자의 삶에서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팍팍할까. "
"나의 결점을 통해 타인의 빈틈을 알아보고 다정한 이해의 눈길을 보냈던 저 순간과 같은, 그런 알아봄의 경험은 정의를 구현하고 세상을 바꾸는 데 하등 쓸모를 갖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서로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가장 작은 방법이 되어줄 순 잊지 않을까 생각했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채 그럼에도 매일의 발걸음을 떼어놓는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별것 아닌 것들일지도 모른다." (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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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별것 아니라고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저자의 방식은 별것이고,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 지치거나 세상이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봤을 법한 상황 속에서 나 아닌 다른 이는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대처하는지 잘 보여준다. 때로는 그 대처 방식이 사람마다 크게 또는 사소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속에 녹아 있는 따뜻한 배려와 자그만 위로는 큰 위안을 안겨준다. 나는 [변것 아닌 선의]를 읽으며 내가 누군가와 나누웠던 사소한 배려와 누군가로부터 받았던 따스한 배려를 떠올리며 행복한 순간을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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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님인 이소영 작가의 반짝이던 날들에 대한 글 모음집이다. 내 안의 선의도 찾게되는 그런 책. 이 책과 함께 추천하고 싶은 책 #당신이잘되면좋겠습니다.
p.100 가진 자들이 얼마나 더 소유했는지에 분개하지 않는 나는, 덜 가진 이들이 나만큼이나마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얼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을 놓지 않으려 한다.
p.146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세심증을 앓고 있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어서다. 어서 만회하려 애쓰지 않고 매일의 주어진 일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관계가 제자리를 찾기도 하더라고 말이다. 마음대로 안되는 조급함이 그대 안의 좋은 것들을 시들게 하지 않기를, 자책과 절망으로 그대를 몰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p. 235 어릴 적 체육 시간에 뜀틀하다 넘어져 친구들과 양호실 가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노랑풍선 같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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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일단 너무 마음에 들어서 샀습니다. 별것 아닌 선의...사실 선의가 별거 아닌거 는 절대로 아닌데 말입니다. 저자가 일상 생활에너 겪었던 소소한 에피소드에서 묻어난 따뜻함과 공감이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읽다보면 마음이 위로가 되고 편안함을 줍니다. 대놓고 상대방을 위하고 억지스럽지가 않고 저자 본인의 품성과 인품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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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년 전쯤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젊은 시절 위선은 위악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모든 솔직하지 못함이 싫었던, 본능과 욕망에 쉽게도 굴복하는 나를 합리화하고 싶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위악보다는 위선이 낫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의 생각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입장이 강화되고 있다고 느낀다.
이소영 / 별것 아닌 선의 / 어크로스 / 279쪽 / 2021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