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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의 영원한 청년 시인인 윤동주는 그의 유명한 <서시(序詩)>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소망에 따라 사후에 출간된 그의 유고 시집의 제목이 되었다. 그는 1941년 12월, 연희 전문학교 문과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자신의 시를 묶어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할 예정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 시집의 첫 머리에 놓여 있는 <서시>는 윤동주의 시세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한 장의 지도이다.
윤동주가 <서시>를 썼던 바로 그 해, 1941년에 오규원 시인은 태어났다. 지금까지 8권의 시집을 상재한 오규원 시인의 30여 년에 걸친 시적 여정은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일관된 시정신이 그에게는 있었으며, 그래서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오규원을 두고 ‘자신의 전 작품을 거슬러 복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오규원 시인이 삼십대를 막 시작하던 시기에(보다 정확히 말하면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쓴 시집 『순례』를 읽는 것은 변화가 많았던 그의 시세계의 비밀을 밝혀줄 시원(始原)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이다. 그 자신도 복간 『순례』의 <자서(自序)>에서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말한다. 우리의 심장이 쉴 수 없이 뛰는 것은 그 때문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시간여행이 지니는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 머리에 놓여 있는 <서시>가 윤동주의 시세계의 핵심을 담고 있듯이, 오규원의 시집『순례』의 첫 머리에 놓여 있는 <순례 서(序)>는 그의 시세계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을 해독하는 결정적 단서가 집약되어 있다. 그것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닌 ‘들길과 바람과 풀과 비’의 세계이다. 윤동주의 그 순수하고 맑은 서정으로 빛나던 ‘천상적 세계’는 오규원에게 와서는 어둡고 음습한 절망으로 가득 찬 ‘지상적 세계’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맛본 죄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듯이, ‘감성(感性)’이 아닌 ‘이성(理性)’으로 시쓰기를 시도한 오규원에게 있어서 그 추락은 피할 수 없는 귀결로 보인다.
<순례 서(序)>의 서장에서 시인은 “들은 길을 모두 구부린다/도식주의자가 못 되는 이 들〔平野〕이/몸을 풀어/나도 길처럼 구부러진다”고 말한다. 윤동주식 감성으로는 이 구절은 요령부득이다. 오규원의 시는 우리에게 다른 독법을 요구한다. 나는 이 구절을 “언어는 대상을 모두 왜곡시킨다/고정될 수 없는 이 언어가/새로운 의미를 드러내/(시를 쓸 때) 나도 대상을 왜곡하게 된다”라고 읽는다. 즉 이 구절은 “언어는 대상을 왜곡시키기 때문에 시(詩)는 대상에 결코 이를 수 없다”는 시인의 절망적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언어’라는 들판에서 왜곡되지 않은(구부러지지 않은) 본래 모습 그대로의 ‘대상’(길)을 찾으려는 오규원의 시적 여정은 이렇게 절망에서 시작된다. 이후 30여 년 동안 ‘언어와 대상’에 대한 시인의 탐구는 집요하고 끈덕지게 계속되어, 수없이 변화하는 그의 시의 다양한 외양 속에서도 그 주제는 일관되게 나타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장에서는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과 마주치게 된다. 이것은 “유예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실존을 예민하게 인식하는 시인”의 초상이다. 바람은 풀잎을 흔들어 깨우고 풀잎은 그 흔들림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아프게 자각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흔들림을 통하여 풀잎은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순례 11) 그 풀잎(시인)의 거점은 들판(언어)이다. 그 들판이 기르는 모든 길(대상)은 막막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바람 앞에 노출되면) 지워진 길이 가끔씩 보이기도 한다. 시인은 한 발자국씩 그 길속으로 떨며 들어간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언어망인 “그물에 걸린 길만 생선처럼 퍼덕인다”(순례 2)는 사실만을 또다시 발견할 뿐이다. 시인은 영원히 길을 헤매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그래서 시인은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인 것이다. 그가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발레리풍으로 다짐하는 것은 희망에 찬 결의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수락의 표시일 뿐이다.
‘들길’과 ‘바람’과 ‘풀’에 이어 이제 ‘비’의 세계를 살펴보자. <순례 서(序)>에서는 ‘비’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나에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나를 여기에서 떨게 하는” 그 무엇인가로 암시만 되어 있지만, ‘비’는 <순례> 연작의 가장 압도적인 풍경이다. <순례> 연작의 여러 시편에서 '비’는 ‘죽음’, ‘밤’, ‘육체’, ‘슬픔’, ‘외로움’ 등과 연관되어 있다.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비’는 무엇보다도 ‘죽음’일 터이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으며, 시간도 비에 젖지 않는다. 강과 시간은 모두 영원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순례1)라고 시인은 덧붙인다. 이 말은 ‘이미 죽은 자는 다시 죽지 않는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지만, ‘죽음을 의식함으로써 인간은 죽음을 넘어선다’라는 말로 읽는 것이 더 타당하다. 죽음은 “비를 먹고 무성히 자란 잡풀”의 “풀잎 하나 흔들지 못한다”(순례3)는 구절이 이를 뒷받침한다.
죽음은 또한 육체에 깃드는 것이다. 그래서 비(죽음)는 정신이 아닌 내 육체를 비벼댄다(순례7). 주검은 죽은 육체다. 주검을 통하여 우리는 죽음을 아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목격한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가 주검이 두려운 건/ 우리가 주검의 비밀이기 때문이다”(순례 10)라고 말한다. 인간의 육체성은 주검의 비밀이며, 주검을 두렵게 만드는 힘이다. 한편으로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인간조건이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 혼자만의 슬픔이다. 그래서 시인은 비(죽음)를 “슬프지도 않은 비”, “제 혼자 슬픈 비”(순례 13)라고 말한다.
오규원의 ‘들길과 바람과 풀과 비’의 세계는 감성의 세계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에게는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세계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움은 남의 나라>(순례 19)가 된다. 그러나 내게는 오규원의 세계가 훨씬 진실되게 느껴진다. 인간은 이미 오래 전에 아름다운 낙원에서 추방당한 존재인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순례 서(序) 1 들은 길은 모두 구부린다 도식주의자가 못 되는 이 들〔平野〕이 몸을 풀어 나도 길처럼 구부러진다 2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나를 멈춘 자리에 다시 웅크린 이슬로 여물게 한다 모든 길은 막막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이 보이고 지워진 길을 인도하는 풀이 보이고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와 죽음을 지나 먼길의 귀 속으로 한 발자국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이 보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3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숲이 깊을수록 길을 지워버리는 들에서 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호올로 나부끼는 몸이 작은 새의 긴 그림자는 무엇인가 나에가 다가와 나를 껴안고 나를 오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두고 길을 구부리고 지우고 그리고 무엇인가 멈추면서 나아가면서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나를 여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