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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거 앨랜 포우의 소설 <라이지아>에서 나오는 인상적인 색채로 토성의 납빛이 등장한다. 무슨 빛깔인지 모른다. 포우도 알리가 없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나에게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황금처럼 빛나던 문자가 사랑하는 애인을 잃었을때 퇴색되어 나타나는 그 느낌. 말테가 이국적 도시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스케치를 할때 그렇게 흐려진 빛깔로 채색되는 것만 같다. 삶과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채 표류하는 인생들, 자신의 존재마저 불안해하는 청년 예술가의 의식의 흐름은 납빛처럼 흐려진 대도시를 뚫고 지나간다.
제임스 조이스의 기법에 조금 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쉽게 대할 수 있었다. 쉽게 읽었다는 것은 이해를 했다는 뜻이 아니라 감동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는 의미이다. 의식의 흐름, 곧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이 이렇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서 또 하나의 큰 기쁨을 얻었다. 윤동주의 시 <별헤는밤>에서 다정한 어감을 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거기 나오는 강아지, 토끼 등의 동물이 이 작품에서도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이채롭게 느껴졌다. 엄숙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와 풍성한 감수성으로 작품을 이끌어 가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소리보다 무서운 정적, 개짖는 소리에서 전달되는 이미지, 한가로운 가게의 묘사, 시에 대한 논평, 임종의 장면에 대한 묘사, 생일날의 고통스런 수술, 찬란한 침묵이라는 시어가 주는 여운은 압권이었다. 하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다루는 부분은 어려웠고, 돌아온 탕자의 재해석은 공감이 가지 않았다.
사랑받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에 약간 무리가 있는 듯 싶다. 최고의 경지로서 신에 대한 사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신도 인간을 사랑한다는 생각도 가능하지 않을까? 시적 재능을 주신 분이 시인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텐데..삶과 의식이 흐려진 세계에 생명을 주고, 그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그와같은 사랑이 아닐까? [인상깊은구절] 이것은 소리들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소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정적이다. 큰불이 났을 때 가끔 극도로 긴장되는 한 순간이 있다. 솟구치던 물줄기들이 사그라들고, 소방관들은 더 이상 사다리를 기어오르지 않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그런 그런 순간 말이다.소리없이 검은 추녀 끝이 위에서 앞으로 밀려나오고, 높은 담이, 뒤쪽에서 불길이 넘실대는 담이 소리없이무너진다. 모두가 멈춰 서서 어깨를 움츠리고, 눈에다온 신경을 모아서 끔찍한 일격을 기다린다.이곳의 적막은 바로 그런 것이다. 나는 보는 것을 배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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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memory)와 추억(rememberance)은 같은 말일까? 다른 말일까? 사전을 찾아봤다. - 기억 :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 추억: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 동의어같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들이 주는 느낌이 각각 다르다. 기억은 '이성'에 가깝고, 추억은 '감성'에 가깝게 느껴진다. 하나의 불변 과거사를 이야기하면서도, 그리고 다름아닌 자신의 입을 통해 타인에게 그것을 전하면서도, 그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이야기가 조금씩 틀려지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사람이다. 이렇듯 기억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그때 그때의 일과 그때 생겨난 기억을 바로 기록하는 것은 미래에 저지르게 될 실수를 조금은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책일지도 모르겠다.
1. 말테 = 릴케 '말테의 수기'는 로댕의 자서전을 쓰기 위해 파리에 체류하는 시기에 겪게되는 스물일곱 릴케의 고뇌와 절망이 고스란히 말테의 언어로 기록되었던 것 같다. 내세울만한 줄거리가 없고 그저 젊은 시인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가족과 옛사람을 추억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수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책이다. 산문시에 가깝다고 볼수 있겠다. 그래서 그냥 줄거리는 포기하고 말테의 가면을 쓴 릴케의 감성과 의식을 따라잡으면서도 그의 들쑥날쑥한 세계를 멀찍이서 바라보는 비성실한 태도로 읽어냈다. 젊은 예술인 말테는 '보는 법을 배우는 법'을 갈구하며, 그 실천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시도'로써 자신의 언어로 기록되어진다. 해설을 보면 이 책은 모더니즘 소설을 여는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포스트모더니즘에 익숙한 나로서는 다소 난해하게 느껴졌다. (대학교 2학년 봄즈음에 '포스트 모더니즘의 이해'라는 책을 끼고 살았다. 끼고만 살았지 읽어도 읽어도 무슨말인지 모르겠더라. ㅋㅋ)
2. 시가 되는 추억 본문 26,27 페이지에 시에 대한 말테의 생각이 적혀 있었는데, 공감이 갔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시란 사람들이 말하듯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와 사람들 그리고 사물을 보아야 하며 동물들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시를 이해하기 얼마나 어려운가? 말테의 말처럼 시는 경험이래서, 우리가 그 시인이 겪은 걸 겪어보지 않아서 어려워하는 지 모를 일이다. ' 커다란 인내심을 가지고 추억이 다시 솟아오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추억 자체로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추억이 우리 몸 속에서 피가 되고 눈짓이 되고 몸짓이 되어 이름을 잃어버리고, 우리와 더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될때에야 비로소 아주 드물게 그 추억의 한가운데에서 시의 첫 단어가 솟아올라 걸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요즘 추억이 다시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어쩔때는 너무 많은 추억들이 내 몸을 휘감아서 휘청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주에 그러했다. 근래 추억을 글로 쓰는 덧없을지 모르는 짓을 종종 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애써 노력해서 추억을 떠올리고 생각과 감정을 끄집어 내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를 어떤 자연적인 힘에 이끌리니 신기할 노릇이다.
3. 변형 개조되는 추억 대도시 파리를 보는 현재의 그의 시선과 감성은 나에게는 다소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무너진 건물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한면의 벽을 보면서 그 벽에 스며든 삶의 냄새를 맡으며 섬세히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부분과 병원에서 느끼는 대량생산되는 듯한 죽음에 대한 묘사는 예술가로서의 예리한 감성이 포착되었다. 그러나 과거를 추억하며 과거의 느낌을 말해주는 말테를 보면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특히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풀어나갈때는 저 생각은 과연 저 당시에 들었던 생각&느낌일까? 아니면 지금 추억해보니 드는 (현재 나에게 알맞게 각색된) 생각&느낌일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역시 그러한 듯하다. 부모를 추억하며 드는 느낌과 생각을 현재 나의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나 스스로 미화시키고 개조해버리는 긍정적인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다. (얼마전 다시 보게된 아버지의 노트에 빽빽히 적힌 100여편의 시들을 보며, 나는 당시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를 발견했다. 시간에서 벗어난 비현실적인 감성에 사로잡히고 내 눈속에 짠 바닷물이 서서히 차올랐다.)
'기억'은 괴로운 것도 즐거운 것도 생각나게 하지만, '추억'은 아련하고 아쉽고 좋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그러한 것들을 끄집어 낼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비록 불완전한 기억을 되돌리고 그날 그날에 따라 추억이 달라지는 것을 '실수'라고까지 표현했지만, 그 기억이 통째로 왜곡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오늘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실수만은 아니지 않을까? |
| 이 책을 벌써 4번이나 읽었다. 처음엔 그냥 읽고, 두 번째는 이해가 잘 안되서 읽고, 그 다음엔 릴케에 대해서 조금 공부를 한 뒤 읽고, 가장 최근엔 그 깊이 있는 관찰과 독특한 문장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다시 읽었다. 다시 접할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릴케의 감성에는 정말이지 탄복이 절로 나온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를 탈고하고 나서 '나의 상상력을 모두 소진했다'고 했다는데, 과연 그 말처럼 우리는 평상시엔 사소하게 지나쳐온 사물들에 대해서도 그의 깊이 있는 탐구를 따라 말테의 시선으로 다시금 바라볼 수 있게 되어있다. 빛이 비춰 생기는 그림자나, 빛이 가까이 갈 때 오렌지색으로 다가오는 사물, 심지어 깨진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는 빛 자체까지..우선 그 묘사의 다양함과 깊이 있음에 시각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다. 그러다 인생의 복잡함, 사람들마다 키우고 있는 죽음의 씨, 심정의 변화 따위에 시선이 미치게 되면 릴케가 포착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의식에도 동참할 수 있게 된다. 릴케의 시적인 문장들은 이런 생각을 군데군데 조각내어 흩어놓아 얼른 주제를 파악하기가 힘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만큼 소설을 읽는 재미 역시 새록새록 솟아난다. 내 경우는 특히 죽음에 관한 대목들이 눈길을 끌었다. 처음의 시작 역시 사람들이 죽기도 하는 병원에 대한 설명이며, 여러 사람들의 죽음이 묘사되고, 심지어 삶 역시 죽음을 키우는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자신과는 원래는 상관이 없을 사람들에 대한 관찰과 묘사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몇 번을 음미해도 흥미로는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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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서울에 왔다. ‘읍’과 ‘리’에서만 머물다가 ‘시’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다 사람 사는 곳이니 똑같겠지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자취방에 짐을 풀었다. 하지만 절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길거리에 붙어있는 내 방은 새벽부터 오토바이 엔진 소리에 잠을 깨우고, 창문을 열면 배기가스가 들어온다. 열려진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호기심은 이해하지만 그 안에 쓰레기를 던져 넣는 꼬마들의 심정은 정말 모를 일이다. 과거 서울은 내게 유행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곳, 일상에서 벗어난 나들이 장소였다. 즉, 나에겐 서울은 놀러가는 곳이지 생활의 장소가 아니었다. 새로운 환경에 놓일 때, 사람은 바뀐 환경에 대하여 적대감을 느낀다고 한다. 현재의 생활 터전은 이전의 생활과 비교되기 마련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코 밑에 낀 검은 먼지가 공기의 불쾌함을 알게 해 주고, 한적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거리, 지하철에서 마주보는 사람과의 거북함, 길바닥에 누워 구걸하는 사람들과 그 곁을 태연하게 걷는 사람들 그 속의 나, 무관심으로 무장하고 외면하는 행위들. 서울은 사람이나 사물이나 너무 많았고, 너무 쉽게 잊혀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즐거움 또한 없다. 생존과 영양을 위해 밥과 반찬을 만들고, 지루함을 덜기 위해 책을 읽고, 인터넷 하고, 영화를 보고,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공부하고, 이렇게 리포트도 쓰고, 소풍도 가고하는데 이 모든 행위가 축적이기 보다는 소진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왜 이렇게 사는 게 피곤한거지?
그것은 내가 서울이라는 땅바닥에서 홀홀 단신이기 때문이다. 낯선 땅도, 취업걱정도, 거리 풍경에 대한 나의 인상도, 노는 방법도 혼자 살아가야 하는 내겐 과제이다. 나의 가족과 친구, 관습, 학교라는 울타리의 밖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피곤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말테는 그러나 계속 이방인이다. 말테와 -말테의 동류인- ‘그들’은 비정상인으로 구분된다. 말테 자신이 이들을 내버려지고 병적인 자들로 묘사한다. 그들 사이에도 교류는 없다. 겁내고 피하고 결국 혼자뿐이다. 말테와 그들의 불안증은 혼자 있음과 고독에 의한 광기, 죽음의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이들이 공동체라는 울타리로 회귀하길 원하는 것도 아니다. 울타리 안(內)을 그리워는 하겠지만 그들은 이미 공동체에서 동떨어져 있다. 개인으로서의 삶과 그것의 낯설음을 체득할 수밖에 없다. [인상깊은구절]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온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
| 책이란 건 쉬워야 한다. 인생의 난해함을 담고 있는 책이라도 그것을 풀어내는 글은 자고로 어렵지 않아야 한다. 짧은 독서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난해했던 종류는 딱 두 가지. 하나는 번역이 잘못된 책. 번역을 하긴 했는데,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는 번역자 자신이 채 소화하지도 못한 내용을 어설프게 풀어냈다거나,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원서의 제 맛을 뽑아내지 못하는 경우일 것이다. 전자는 욕심만 앞서고, 후자는 실력이 '뒤서기' 때문이겠다. 이런 책은 두 번 읽어도 이해 안되기는 마찬가지. 두 번째는 원래 사상이 깊거나 복잡해서 그 정수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책이다. 물론 이는 철저히 나의 이해력 부족에 기인한다. 그런데 이런 부류에도 글을 쉽게 전개하는 작가가 있는가하면, 정말 난해한 스타일로 기술하는 작가가 있다. 후자의 스타일로 얼른 떠오르는 작가가 소설가 박상륭이다. 문체와 그 내용의 범상치 않음은 나를 금세 기죽게 했는데, 그 광활한 사상의 '아우라' 정도에서 허우적댔던 기억이 있다. 이런 책은 다시금 도전하게 만드는 책이다. 아무튼, 기억을 더 더듬어보면, 책읽기가 까다로웠던 책은 이론을 다룬 원서(영어든, 한자든 한글로 되어있지 않은 책)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또 한번 책읽기의 난해함을 경험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처음부터 '수기'라고 얕본 게 실수였다. 수기(手記)라 함은 필시 자기가 체험했던 내용일 터인데, 읽어내는 게 이렇게 만만치 않아서야. 이건 마치 내가 중학교2학년 때, 크리슈나무르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 읽기와 흡사했다. 왜 그 책을 읽었는지는 기억나진 않지만, 나에겐 한번 잡은 책은 끝까지 읽고 마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그 책은 마치 한글 공부하는 아이처럼 이해되는 문구에만 고개를 끄덕이는 글읽기로 일관했다. '말테의 수기'를 읽는 동안 나의 모습 또한 그랬다. 도통 맥을 잡을 수 없고, 소설이라고 하지만 그 구성에서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국어 시간에 배운 소설의 구성에서 일찌감치 벗어난 소설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오기란 놈은 이럴 때 불끈 한다. '어떻게 결론 나는지 읽어나 보자'는 심정이 된 것이다. 내팽개치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고 '한 번' 읽었다. 평소 책 말미에 붙어있는 '해설'을 읽지 않던 나는 이번엔 역자 해설을 참조하기로 한다. '현대인의 불안을 그려낸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이란다. '수많은 단편과 인상의 편린, 그리고 자그만 에피소드들이 모여서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는 해설이 있다. 과연. 이 역자도 읽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적어도 두 번은 읽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이 소설의 참 맛을 안다고. 일견, 릴케가 시인이어서 이 소설이 어려워진 게 아닌가 싶었다. 소설 전체가 '산문시'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상징'이나 '비유'가 많기 때문이다. 시인의 눈으로 사물을 봤으니 어련하겠지. 아무래도 역자의 충고를 들어야겠다. 지금 내 머리 속에는 불안, 운명, 죽음, 변화 등의 확실하지 않은 잔상들이 동동 떠다닌다. 책을 손에 쥐고 휘리릭 넘겨본다. 주황색 형광펜으로 그어진 문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난해하다. 잡을라치면 손아귀의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그 중 인상적인 문구들을 훔쳐다 놓는다. 다음 책읽기를 기약하면서. : "세상은 기성품이니 그걸 걸치기만 하면 삶이 된다" "추억이 많아지면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 방들 속에서의 끈질긴 삶은 밟혀 없어지지 않았다" "만일 무언가 정히 변해야만 한다면 적어도 개들 사이에서라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쓰는 게 아니다 내가 씌어질 것이다" "나의 하루는 바늘 없는 시계판 같다" "잊어버렸던 모든 불안들도 다시금 돌아와 있다" "이제 거울이 힘있는 자가 되었고 나는 거울이 되었다" "시간은 귀찮은 물건이었어" "아직도 어딘가에 한 조각의 분장이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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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 것은 아니지만 집에 릴케를 소재로 한 책들이 몇 권 있다. 평소 시를 거의 읽지 않는 편에 가깝지만, 릴케에 대해서는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알고 있었다. 작가에 대한 비화를 어디선가 들었던 경험으로 추측되는 그의 감수성과 더불어, 그 이름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문학적인 면모-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상상하는 여러가지 것들-, 그리고 루 살로메와의 사랑에 개입된 인물이라는 사실이 내게 그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러던 중, 그가 남긴 시가 아닌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접한 책이 <말테의 수기>다. 이 책의 첫장에 나는 반했다. 파리라는 대도시에 온 말테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서술해나가는 일기 형식의 첫 장에서 그는 마치 뫼르소를 연상케 하는 고독을 독자에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금새 현실을 벗어나고 초월하여, 말테의 어린 시절, 그의 회상기로 넘어가고 만다. 말테는 릴케의 분신과도 마찬가지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인 듯 이 이야기는 개인의 감수성에 완전히 탁월하게 함몰하여 부유하는 느낌임을 지울 수 없다. 마치 한 조각의 마들렌에서 어린시절에 대한 회상을 시작하는 프루스트의 글처럼 릴케 역시 아른한 환영과 몽상을 어린시절의 기억들 속에서 구현해내기에 바쁘다. 나는 이 책에 마치 카뮈의 캐릭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솔직히 많은 부분에서 인내심을 발휘하고 실망을 느껴야 했다. 비록 이 소설의 특유의 매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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