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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책은 처음이다. 조금씩 오래 읽었다. 교과서 지문 같은 글은 동일 표현을 중복하지 않고자 애쓸 뿐 아니라 강연 맞춤형으로 놓치거나 잘못 듣지 않도록 챙긴다. 이 지점에서 호불호가 갈리는데, 나는 그의 굵직한 선과 아는 만큼 말하는 책임지는 언어가 좋았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두 번 읽은 독서 파트너는 나와 달랐다. ‘정의란 무엇인가’도 읽은 그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혜안과 해법을 원했다고 한다. 독자 반응 비평처럼 독서 파트너의 개별 경험이 감상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교육 종사자이고 자녀들의 입시 전쟁을 막 치렀고 소위 말하는 능력merit을 갖췄음에도 삶에 좌절하는 아픔을 알기에 여러모로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 같다. 파트너와 달리 십 사년의 티칭에 종지부를 찍었고 자녀 교육의 면밀한 현장도 모르고 친인척 중에 엘리트나 기득권으로 분류될만한 가촉인^^이 없다. 직업적 책무에서 떨어져 나와 약간은 향수 어린 시선으로, 청춘의 대부분을 관통했던 미국의 ‘민주주의 정신’을 조목조목 되짚어주니 내 안의 꺼져가던 삶의 불씨가 되살아나곤 했다. 이런 자세로 독서를 마쳤고 리뷰를 작성함을 미리 밝힌다. 애초에 읽는 방향이 서로 달랐던 것도 같다. 최근 나는 소위 명문대학을 나온 의사들과 정치인들에게 실망이 잦았다. 인간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고 권위주의적인 고자세로 관계를 설정하고 그들만의 리그party(정당 혹은 잔치)를 펼치는 모습에 경악했다. 지독한 경쟁과 부모의 패런팅(부모의 동사-화)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민낯은 형편없었다. 많이 안다는 독선과 높은 자리에서 사람을 ‘내려다보는’ 멸시와 하대가 흔했다. 저자는 “오만”hubris과 “굴욕”humiliation을 대비하며 능력주의가 낳은 병폐를 들여다본다. 굴욕이라는 단어는 겸손humility과 생김이 유사하나 뜻은 천지 차이다. 교만하고도 남을 위치에서 겸손이 탄생하기도 하니 그만큼 ‘태도’가 중요해진다. 쉽지 않은 읽기였지만 내가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흠모함이 더욱 뚜렷해졌다. 유럽의 계급이나 복지와는 다른 노선을 취해온 활기찬 긍정 에너지를 무의식적으로 추앙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언뜻 사대주의로 비칠 소지가 있는데, 그들의 ‘정치 언어’와 수사가 젊은 날의 나를 강타했던 것이다. 국가 건립부터 정치 연설과 문학에 자리한 민주주의 정신이 몸과 정신을 연동해 매료되었다. 영문학이나 문화권에서는 느끼지 못한 평등과 자유, 해방감이 흠뻑 배어 있는데다가, 어렵지 않고 리듬감 있게 말하고 쓰며 세상을 이끄는/바꾸는 실용 문학이 투명해서 좋았다.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영국에서 셰익스피어가 거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은 언제든지 다시 부활할 이상이자 뿌리라고 생각한다. 글이 사담화(민주당 당대표 후보의 사당화 발언을 비꼼^^) 되는 경향이 다분한데 좀 더 솔직해지겠다. 삼 년 가까이 실직 상태로 머물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꽈배기 상태였다. 지난 시간을 돌아볼 엄두도, 다른 삶을 추진할 자신도 없이 확 놓아버리고 싶고 더해서 뭐 하나 싶은 충동이 수시로 발동한다. 출신과 환경이 특권이나 우호와는 거리가 먼 내게 어느 날 날아들었던 자수성가, 즉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도모하는 열린 가능성은 환상과 신기루가 아닌 신념이자 도덕이자 가치가 되었다. 환경이나 문화가 전혀 달랐음에도 마이클이 (대)학생들을 향해 느끼는 연민과 안타까움에 공감하고, 한편 교육제도의 보수성을 이해한다. 독서 파트너에게 고백했듯이 소위 명문대 학생들이 그의 교양 강좌를 듣고 함께 온전해지는 인간의 본질과 존엄에 관한 작은 씨앗이라도 머리에 달고 사회에 진출한다는 상상에 ‘희망’을 건다. 엄청난 경쟁 속에 살아남은 승리자의 “강박적 완벽주의”에 따른 우울과 구속에 대한 고발도 사랑으로 들렸다. 물론 그들이 사회적 비극의 희생자 혹은 먹잇감이 되는 경우는 극소수일 테고, 명문대 신입생들이 호소하는 마음의 병 또한 그들이 병원에 다닐 수 있는 재정적 기반과 시간적 여유를 전제로 할 것이다.
이제 책 내용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보겠다. 마이클 샌델이 관심 갖는 건 사회 개혁보다는 (일관적이되 모순된^^) 개인의 정신과 자기 신뢰의 회복repair에 있다. 이것 역시 미국의 고유한 기원이나 신화와 맞물린다(미국을 대표하는 초절주의 사상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이전과 다른 나라를 세우겠다는 이민자 출신의 선조들에게 신의 섭리와 목적, 그리고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과 결집은 그들이 가진 거의 모든 것이었다. 소속감과 개선 의지가 흔들리면 미국은 존립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괴리가 있다 해도 민주 교육에 남다르고, 귀족정이나 대물림 세습 사회는 지속적인 척결 대상이다. 독서 파트너는 저자가 민주당, 즉 진보 진영의 지도자들의 정책에만 문제 제기하는 게 불편했다고 한다. 한국과 다르게 트럼프를 제외하고 민주당이 장기 집권을 했고 시간의 누적 속에 결과물을 평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2016년 트럼프 당선이 커다란 충격이고, 뒤늦게 대중의 분노를 감지sense하며 사회적 핫이슈가 되었다(소수인종이나 기타 갈등은 학계 진출이나 예술 문화 생산의 형태로 환기되고 조율되어왔다). 샌델도 이 책을 집필하면서 코로나 대응에 드러난 미국인의 이기심과 계층 분열을 목격하고 공공선을 더욱 강조했을 터이다. 대선 직후 힐러리가 당선자 지지층을 향한 “개탄” 발언이 불거진 것도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사회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저자의 논지는 민주당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능력주의를 채택하고 널리 퍼뜨린 것에 주목한다. 어조에 있어 격분하는 일이 없다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클린턴이나 오바마가 ‘대학교육’, 즉 졸업장을 사회적 이동과 신분 상승의 마법 솔루션으로 제시한 점에 폭발한 듯싶다. 기존의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이 대통령의 허황된 정치 수사에서 나온 까닭이다. 폭넓고 다양한 의견 수렴이나 공적 숙고public deliberation 절차 없이 “스마트(/덤 이분화)” 정책이 마치 광적인 포교 활동처럼 사회 전반을 지배하여 일상을 노예화한 것을 문제 삼는다. 사실 미국만의 예외적이고 특수한 현상도 아니다. 신자유주의, 시장자유주의, 글로벌화의 바람을 타고 선동적으로 분별력 없이 가동된 정책에 대한 성토에 가깝다. 다양성을 추구하고 기회 확장과 증후 감지와 대전환으로 나갈 수 있는 단계에서 도리어 “유동성”을 가로막은 실책이라 보고 비판한 것이다. 기존의 구태 정치를 피하려다가 더 심각한 불평등과 불공정을 공고히 하고, 그 바탕인 민주 시민 정신과 가치와 윤리를 훼손한 점을 부각시킨다. 대학교육에 혈안되기 전, 시민들은 노동을 통해 공동체에 소속감과 연대 의식을 느끼고 공공체에 기여한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GDP나 SAT 등의 숫자와 가시적 성장에 모든 포커스를 맞춘 나머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우선시할지를 두고 탐구하고 모험할 청소년기를 오로지 부모가 짜준 설계대로 움직이며 폐쇄적인 의존에 길들여지거나 아예 기회조차 없이 상대적 박탈감과 무력감에 빠진다고 진단한다. 특히 성장기에 양육과 교육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적으로 의존하는 게 문제가 된다. 개인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은 빚진 마음과 상호의존성을 각성시키기 때문이다. 실패와 낙오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의식 구조에서는 엘리트와 기득권의 자녀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저자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우수한 학생들이 편협한 자격론 사고deservingness에 갇힘을 대학교육 현장에서 체감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샌델은 토론을 인간다움(존엄성 회복)과 상호 연결성의 핵으로 여긴 듯하다. 그래서 그가 대입 추첨제를 말할 때 묘수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평준화level하겠다는 것인가 의문이 들지만, 저자는 어차피 선별 과정에서 대학 측의 입김이 들어가니 계속 언급했던 운chance의 속성과 임의성을 토대로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로또나 추첨제보다 운이 깃드는 집중포화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의 주장을 들여다보면 학생들의 사고력이나 표현력이 그다지 차별적이지 않다고 일침을 놓는다. 대학이 개성 없는 개량 생산품 제조 공장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직언이다. 그러니 일정 수준에서 컷오프한 뒤 임의로 돌려 뽑자는 취지다. 비판이나 문제 제기에 약한 엘리트 집단이 따끔할 것 같다. 아무래도 사십 년 지기 학자이다 보니 학계에 대해서 집중 발언한다. 경제나 복지나 재정 분야를 말할 때는 추상적으로 어렵게 말이 꼬인다. 그럼에도 노동자가 발언대에서 목소리내지address 못하는 불평등에 따른 분개와 무력감을 정확히 꼬집는다. 원래 풀뿌리 모임이나 민주 시민 교육이 제대로 실행된다면 저학력이나 저임금 노동자가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으로 취급 받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탓이다. 모든 생명이 존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지시나 질서에 따라 경멸과 모욕 주기를 일삼는다면 그 문화 풍토는 제2의 트럼프를 다시 마주 할 수 있다(내뱉기조차 소름끼쳐 말을 끊었는지도^^). 이쪽저쪽 고통을 야기하는 “분배의 정의” 대신 “기여의 정의”(공헌 인정과 명예 회복)를 구현하는 사회로 나가자는 아이디어가 빛난다. 아니면 결정적인 순간에 중간자의 위치에 서는 학자의 한계일 수 있겠다. 시장자유주의나 복지국가 정책 모두에 도사리는 함정과 허점을 거론하는데 그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 역시 무자비한 심판과 판결이 어떻게 인격 살해를 하는지 누차 말했던 터라 교묘히 둘러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책의 방향은 독자를 질문하는 숙의의 공동 장소, 즉 제3의 장소로 이끌 뿐이다. 진정한 교육(에듀케이트: 끌어주는 역할)의 소임을 다하는 입장이라고 본다. 그는 대학교육에 있어 기술관료나 전문가 집단이 문지기로 나설 뿐 결정적인 정책 입안자나 절대적인 행정가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리뷰를 쓰면 쓸수록 그는 대중 강연자 조던 피터슨과 대조적으로 정치색을 입혀 말하지 않는다. 정치적 논쟁과 담론이 중요하다지만 정쟁의 도구로 국민을 분열시키고 한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 디자인하는 데에 쓰이질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 해도 독서 파트너가 제기한 구멍이 보인다. 그는 최근 이십 년, 사십 년(크게는 육십 년)의 이탈과 도덕적 해이를 초래한 능력주의 정치 ‘기획’과 지배 이념을 비판하지만 이미 1960년에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이 사회적 비극을 예고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마이클 영이 ‘능력주의의 태동’으로 디스토피아 미래 사회상을 경고했던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굵직한 선은 어찌 보면 찌를 허점과 답답함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치판에서 느끼는 언어 오염과 언론 플레이에 닳고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 인간 에이전시(깨시민)로서 다시 일어서게 하는 역할은 톡톡히 한다. 작금의 민주당은 시민과 지지자를 무력화하는 상처주기hurt를 당장 멈추고 정치적 효능감을 맛보게 돕는help ‘소통과 혁신’의 정당으로 거듭나야 옳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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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공정하다는 착각' 제목만 듣고 이 책은 불평등을 규탄하고 부자들 때려잡는(?) 책으로 호도하는 걸 많이 봤는데 이 책은 사실 글로벌 사회와 기술 만능 사회를 기치로 내건 미국에서 어떻게 대중과 (정치, 경제 분야의) 엘리트들의 인식이 벌어졌는지, 대중이 체감하는 '불공정'을 정치인들이 얼마나 둔감한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누누이 설명한다. 트럼프를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시킨 사회.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의 인식은 어떤지, 어떻게 바꿀 수 있고 조정해 갈 수 있는지. 당장 우리에게도 너무나 절실한 시대 담론이다. |
| 샌델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해왔던, 개인의 능력을 우선시하고 보상해주는 능력주의 이상이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능력주의가 제대로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 ‘공정함=정의’란 공식은 정말 맞는 건지 진지하게 되짚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