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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지우고 싶을 때가 있다. 지워야 할 때도 있다. 어떤 경우든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이 홀가분할 수는 없다. 인연이 끝났다는 의미와 닿아 있음이다. 살아 있어도 더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아름다운 인연이었으나 추억조차 남기고 싶지 않은 사람인 경우는 괴로움과 싸워야 할 때도 있다. 아름다움만 남긴 사람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때는 아픔이 수반되는 지움이다.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김윤환/모악)'은 이런 아픔을 꾹꾹 눌러가며 삭이는 시집이다. 기도, 이름, 무덤, 빈자리, 손, 걷기, 저녁 같은 이미지를 중심으로 쓴 시가 대부분이다. 어느 한 편이 독립적으로 강렬하지 않아서 친근하다. 난해한 시어들을 아슬아슬하게 얽어놓은 시가 없어서 편안하다. 읽으면서 위안을 얻게 되는 시들이 내가 지워야 할 누군가를 생각하게 한다. 자존심에 갇혀 나를 고집했던 시간을 조용하게 반성하면서. 여러 편의 시가 서로 낮은 음으로 공명하는 것이 참 좋다. 그것들이 하나의 정서를 이루는 구조가 특정 시를 표제작으로 만들지 못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시집의 표제는 수록작 전체를 아우를 뿐 표제를 특별하게 다룬 한 편의 시가 없는 것이 오히려 특별하다. 시를 읽다 보면 말을 아끼는 방식으로 세상과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참 바람직하지 않은가. 세상의 군더더기를 걷어내면서 살아야 하듯, 군말들을 덜어낸 것이 제대로 된 시라는 생각을 하면. 수록작들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은 무엇을 더 쓰기 위해서라기보다 무엇을 덜어내기 위해 쓰인 시들에 가깝다. 말로 세계를 채우기보다, 말과 말 사이에 남는 침묵을 오래 바라본다. 그 침묵 속에서 독자는 저마다의 기억을 불러내고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집의 중심에는 지움이 있다. 그 지움은 냉정한 삭제가 아니다. 애써 남겨두지 않으려는 다정한 몸짓 같아서 억지스럽지 않다. 누군가를 잊기 위해 지우는 것이 아니라, 너무 선명해 아픈 기억을 견디기 위해 서서히 희미하게 만드는 일. 시인의 시는 그 과정을 성급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사라지는 순간보다 사라지고 난 뒤의 공기, 그 자리에 남은 온도를 오래 응시한다. 그러는 사이 뭉근한 기억들이 풀어진다. 시인은 시 속에서 자주 멈춰 선다. 나아가기보다는 뒤돌아보고, 말하기보다는 듣는다. 그의 시어들은 낮고 느린 이유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시어도 눈에 띄게 도드라진 비유도 없다. 오래 사용해 닳은 일상의 언어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이 평범한 말들이 시 안에서 조용히 겹쳐진다. 읽으면서 문득문득 내가 지나쳐온 장면을 떠올리게 된 것도 그래서다. 지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던 얼굴, 이름, 목소리 같은 것들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종교적 성찰과 인간적인 연약함이 나란하다. 설교나 고백과는 다르다. 신앙이 세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숨결처럼 시의 바닥을 낮게 받치고 있을 뿐이다. 종교적 성찰이 많음에도 특정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대신 누구에게나 있는 상실의 경험, 관계의 끝에서 느끼는 공허를 조심스럽게 건넨다. 시집을 읽으며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지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워진 것처럼 보이는 기억들도 다른 이름으로 남아 우리를 건드린다. 시인은 그 잔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잔여 기억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말하는 듯하다. 완전히 잊지 못하는 존재, 끝내 정리되지 않는 감정이 우리 삶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이 시집이 나에게 편안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렵지 않지만 가볍지 않고, 사유는 깊지만 과장되지 않은 시. 한 편을 읽고 나면 오래 생각하기보다,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시. 내가 좋아하는 시다. 더 한다면 그 호흡 속에 내 삶의 한 장면을 조용히 접어 넣게 되는 시가 좋다. 바쁜 일상에 지친 영혼의 휴식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곁에 앉아 함께 바라보는 일.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아주 평범한 사실을 깨우치는 조용한 동행의 기록을 읽은 짤막한 나의 감상으로 일독을 권한다.
지우개로 문지른 자리 종이는 더 하얘졌지만 손끝에는 사라진 이름의 온기가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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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누군가는 나를 그리며 살았겠구나 지우는 일과 그리는 일이 톱니가 되어 여기까지 왔구나 초록에도 제 꽃잎을 떨구는 그리움과 사라짐의 중간 어디쯤 이슬이 햇살에게 입술을 맞추고 있네 |28 맑고 푸른 아침을 내 것처럼 으스대지 말 걸 그랬어 오후가 가까울수록 쓸쓸한 시간 꽃은 지고 향기도 말라 아무것도 건져올 수 없는 이승의 벌판 하늘의 별이 아니라 어둠의 별이 되고 싶었지 동굴의 눈이 되고 싶었지 |39 이 땅의 시인이면 무엇하랴 이 땅의 목사이면 무엇하랴 평화를 노래할 수 없다면 무덤을 비추는 빛을 볼 수 없다면 |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