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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설교’와 ‘상상’이라는 단어가 도무지 안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를 상상한다고 하면 사실이 아닌 허구의 것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진리를 전하는 설교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뭔가 설교의 잔기술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을만한 신변잡기를 말하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저자가 단순한 설교의 방법론적인 측면이 아니라 본질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으며 인간적인 재주가 아니라 지극히 성경적인 방편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설교에 있어서 ‘상상’이 왜 중요하며 어떻게 ‘상상’을 담아내야 하는지 저자의 견해를 살펴보면서 간략하게 평가해 보도록 하겠다.
2. 설교에 있어서 상상력의 중요성 우선 책을 읽다보니 내가 ‘상상’이라는 개념을 잘 못 이해하고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상상’이라는 개념은 실재하는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사실을 상상력을 동원해 전달하는 것이 저자의 관심사이다. 따라서 저자는 성경 본문 그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석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 없는 의미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 그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청중이 체험하게 하는 것이 상상이 담긴 설교의 본질이다. 사실 국어사전에서도 ‘상상’이라는 단어를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봄’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현상이나 사물이 거짓이라면 ‘상상’은 허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상상하는 대상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상상’은 대상을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문제는 ‘상상’ 그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상상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상상’ 그 자체는 진리를 아주 생생하게 전해주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설교가 얼마나 상상력이 빈곤한 설교였던가 하는 것을 돌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상상력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예찬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상상이 담긴 설교를 위해 은유를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 메시지를 더 효과적이고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을 은유를 통해서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은유가 아니라 알레고리가 된다고 저자는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사실을 상상력을 갖고 이해하고 다루는 일은 사실 자체를 상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청중들이 이미지를 그리도록 설교에 상상을 담아내는 것과 청중들에게 시각적 이미지 자체를 보여주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 즉 청중들에게 성경 메시지 전달을 위해서 영상이나 사진 같은 시각적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경계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단순히 성도들에게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효율적인 것만 추구하고자 한다면 청중의 머리 속에 말을 통해 그림을 그려지도록 하는 것 보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자극적이고 효과적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기독교 신앙은 이미지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전달되어 왔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3. ‘상상력’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상상이 담긴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이 대목에서 온갖 신변잡기와 같은 잔기술들이 소개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저자는 설교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인 성경 해석 방법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사실 설교에 상상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주제를 가공하는 방식이나, 청중에게 전달하는 방식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의외로 저자는 본문 해석의 과정에서부터 상상력이 동원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 저자가 성경을 기술할 때 이미 상상이 담기도록 기록했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도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구속’, ‘칭의’와 같은 신학 용어들도 ‘법정’, ‘노예시장’과 같은 상황을 상상하도록 하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상상력은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본문이 의도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물론 신학적 용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성경 자체가 여러 가지 문학 장르를 수단으로 해서 기록됐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성경 해석에 상상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데도 그동안 그 부분을 간과해왔던 것 같다. 마치 성경을 교리를 설명해주는 논문이나 명제집처럼 읽으려고 했던 것이다. 성경 자체가 이미 상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상상이 담긴 설교의 모델을 예수님의 비유, 사도들이 사용한 다양한 메타포들을 통해서 성경 속에서 찾아서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성경 속의 사례들을 상상이 담긴 설교에 대한 정당성과 성경적인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책의 초반부에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는 사무엘하 17장의 후새의 언변은 연설이나 강의에 대한 예라면 몰라도 진리를 전하는 설교에 대한 예로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다윗을 돕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압살롬을 속이기 위해 간교를 부리고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의 과정뿐만 아니라 주제를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성경 자체가 말하는 내용과 오늘날 청중 사이를 연결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 내용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람들에게 들려진 말씀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 말씀을 일반화해서 다시 이 시대의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 움직이도록 연관시키려면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은 어떤 공식이 있어서 그대로 따라하면 간단하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상상력을 기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폭넓은 독서와 대화, 일상적인 체험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들을 메모하는 습관 등을 통해서 상상력이 길러진다는 것이다. 사실 영상의 힘이 강조되는 시대적 상황이 책을 읽고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표현하는 기회를 앗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배출된 설교자 역시 상상력의 빈곤을 면치고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나 또한 신학을 하면서 신학적 주제 외의 다양한 주제에 대한 독서와 대화, 사고가 매우 부족했던 것 같다. 설교자로서 사고와 언어가 굳어져버리지 않도록 독서의 폭을 넓히고 일상 속에서도 삶의 의미와 진리를 발견하는 감수성을 기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나가며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책은 성경해석학, 성경신학, 역사신학 등 다양한 신학적 이론과 설교자로서의 실제 경험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소개하면서 이론적인 면에 있어서 자신이 취약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책을 읽어보면 저자의 이론적 지식이 결코 얕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독서의 폭도 상당히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상이 담긴 설교를 이론적으로만 설명하거나 다른 사람의 설교만 예로 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설교했던 내용을 실례로 보여주고 있어서 실제적인 적용에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절기설교에 대한 예들은 아주 신선했다. 사실 매해 돌아오는 절기마다 새로운 설교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매해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있다. 그런데 저자가 제시한 예들을 보면서 매해마다 동일한 주제를 다른 접근 방식으로 설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저자가 설교학을 연구하는 학자가가 아니라 설교자이기 때문에 제공해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지나치게 논리적이어서 상상력이 부족한 설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상상이 담긴 설교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 제기가 미국의 경우는 어떨지 몰라도 한국 교회에는 가장 시급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볼 때 한국 교회의 설교는 설교로서의 최소한의 논리 구조도 없이 앞뒤 말이 안 맞거나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상상해서 설교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가 말한 상상이 담긴 설교가 한국 교회 강단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짜임새 있게 내용을 구성하는 방법부터 배우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접근 방법 가운데 몇몇 아쉬운 점이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 책을 통해서 상상이 담긴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러한 상상력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배울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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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잘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안다기 보다는 그 사람에 여러부분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하고 증명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상상력으로 메꾸어서, 보지 못한 부분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분들이 합쳐져서 우리는 그 사건을 '안다'고 여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건과 인물에 대해서 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아는 만큼 상상할 수 잇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상은 우리로 하여금 머리속에서 텍스트가 춤을 추게 한다.
이와 같은 텍스트의 춤은 생동력 있는 전달로 변화하여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한다
이책은 그와 같은 역할을 한다. 글이 살아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잘 전달되게 한다. 설교를 준비하는 신학생이나 현직 목회자에게 최근 설교현장이 무엇이 문제인지 제시해 주는 해결서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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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설교학 개론 수업'을 맞이하여 읽고 있는 설교학 책 중 2번째 책이다. 첫번째로 읽었던 정장복 교수님의 한국교회의 설교학 개론이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면 이 책은 설교에 대한 전혀 다른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목이 '마음의 화랑에 설교를 그려라.'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설교는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의사소통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의사소통이 효과적이 되려면 이미지적인 그림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설명적인 언어를 사용하거나, 개념전달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적 언어를 사용하여 사람들이 귀로 들은 것을 눈으로 떠올려 보게 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진리를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서룍자의 과제란 작가의 과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좌뇌만을 쓰지 말고 우뇌도 같이 쓰라는 것이다.
릴랜드 라이캔이라는 사람은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성경 해석가들은 설교나 가르침을 논문이나 강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교는 이야기나 시를 쓰는 것이다.'
글쓰기에 재주가 없고 (특별히 문학적인 글쓰기), 픽션보다는 논픽션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니 픽션도 꼭 논픽션을 볼 때와 같은 자세로 보는 나에게는 정말 부담이 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중학생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가의 주장은 부담스럽지만 무시할 수 없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글을 읽고 있다.
설교에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저자는 나단의 설교(삼하 12장)를 통해 말하고 있다. 만약 나단이 다윗에게 죄가 어떻고, 결혼이나 불의가 어떻고 하는 주제를 추상적으로 다루는 교리 설교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설교를 듣고 다윗이 회개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은 말한다. '딱딱한 윤리를 가르치려면 시적이고 예술적인 말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듣는 사람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은 늘 상상과 연결될 때만 일어난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대개의 경우 내가 필요한 것은 새로운 충고가 아니라 아는 것을 행할 힘이다. 설교자의 역할은 이러한 것이 되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만 얘기한다면 예수님 당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한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행하고자 하는 용기와 의욕을 북돋아 주는 역할이 바로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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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2부로 이루어져 있고, 제1부에서는 본문의 강해와 그에 따른 진리의 전달 중심의 기존 설교 패턴을 고수하는 것이 얼마나 청중들에게는 고된 일인지, 그에 따른 대안으로서 청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상상을 자극하는 설교가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특히 이야기와 은유가 가지고 있는 힘을 활용할 때 그것이 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제2부에서는 본문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를 어떻게 찾아내고 종합할 것인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서술한 후, 청중이 처한 구체적인 삶의 환경 또는 상황이나 교회력에 따른 절기에 적절한 설교에 대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본문의 적절한 예들과 함께 드러낸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역시 1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청중의 상상을 동원하는 것으로서의 설교이어야 함을 잊지 않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설교자의 창조 력에 있는 것임을 추가한다. 설교신학적인 논의들을 전반에 걸쳐 다루지 않고 있고 또 그것이 저자의 목적도 아닐 테지만, 저자가 중요시하고 있는 '청중으로 상상을 하게 하는 설교'의 필요성과 그것이 갖는 힘을 적당한 예증과 논증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실제 여러 설교에서 성경본문이나 그에 따른 요약, 핵심 주제 등을 제시함으로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그림을 그려줌'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로써, 그가 설교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바를, 또 그 효과를 이 책에서 전체적으로 증거하고 있고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 셈이다. 다만, 청중이 설교를 들음에 있어서 상상력이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1부에서의 설명이 여러 부분 중복되고 있다고 본다. 물론 자신의 주장의 든든한 밑바탕이 필요했겠지만 말이다. 2부에서 설교의 실례로 본문과 요약과 중심주제를 든 부분은 설교자들에게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한 예가 되었고, 설교자로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계발할 충분한 자극을 준다 하겠다. 무엇보다 그 예들을 그대로 설교에 접목할 수 있는 자료들이 된 것으로 다른 독자들에게도 환영을 받을 만 하다. |
| 이 책은 제목 자체가 이미 전체 내용을 잘 요약해서 담고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사무엘하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과 그 결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지혜롭고 논리적인 아히도벨의 모략은 후새에 의해 파해졌는데, 후새의 의견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의 언변, 즉 메시지 전달 방식에 있었다. 후새의 이야기는 눈으로 보듯 느낄 수 있는 감정에 호소한 이야기였다. 권위와 정확성과 논리와 지혜를 담고있던 아히도벨의 의견은 상상력과 은유로 가득한 후새의 언어에 의해 묵살되었다. 저자는 바로 이 후새의 메시지를 설교의 모본으로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듯 하는 언어의 사용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머리 뿐 아니라 가슴으로 반응한다. 세상은 진리가 드라마로 상영되는 무대다. 말은 은유적이어서 주변 세계와 우리의 내면 세계를 이어준다. 이 세가지 진리가 의사소통에 필수적이다. 인간은 늘 상상으로 통해 살아간다. 상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따라서 설교를 논리적 이성으로만 하면 전달이 안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화랑에 상상력을 통해 어떤 상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에서의 사상이란 기법이 아니라 일종의 태도이다. 바라보는 눈이다. 성경자체가 이러한 상상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후새는 이러한 그림언어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그가 그린 그림들은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주변세계에서 얻은 것들이다. 그리고 말의 은유는 사람과 주변세계를 연결시키는 수단이다. 사실 우리의 일상 언어는 온통 은유로 가득하다. 은유적 언어는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 수천 단어의 가치로의 역동성을 발휘한다. 이러한 은유를 통해서 사람의 세계관이 변하고, 영적체험이 일어나게 된다. 저자는 나단의 이야기를 통해 비유의 힘을 말한다. 비유에는 이미지와 개념의 균형이 중요하다. 역시 비유를 통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교회 현실에서는 상상력 있는 설교가 고갈되어 있다. 말씀을 듣지만 말씀을 보지는 못한다. 지성에만 호소하지 감정에 영향을 주는 설교가 없다. 저자는 사람들이 상상력에 굶주리고 있는 원인을 저자는 실용주의적 사회로 보고 있다. 사실주의의 예술과 지식 위주의 학교 교육, 텔레비전 등이 또한 사람들의 상상력을 고갈시키고 있다. 2부에서는 구체적으로 성서 본문에서 상상력을 동원해 메시지를 끌어내고 작성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본문에 대한 일곱가지 질문이 메시지를 준비하는 추천방법이다. 각각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되어있다. 설교의 작성에 있어서는 분석과 종합이 중요하다. 주석과 분석에 상상력을 통한 종합 작업이 있어야 한다. 설교 뿐 아니라 이것이 우리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동시에 저자는 모든 설교는 복음적이고 성서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제가 무엇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설교 작성 및 전달에는 독창성있는 새로운 방식의 설교가 요청된다. 이상과 같이 1부의 내용은 보다 자세하게, 2부는 간략히 요약해보았다. 저자의 표현대로 오늘 한국 상황의 교회에서 설교현장을 묘사하라고 하면 '강단에 춤추는 해골, 좌석에 늘어진 송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무적으로 예배시간에 참석해서 설교는 듣지만 몸과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 설교자 역시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그리고 선포할 때마다 이러한 현상을 어쩔 수 없이 반복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저자의 주장은 이런 면에서 그 해답이 될 수 있다. 분석하고, 파헤치지만 결국 설교를 통한 성서본문의 전달은 지성적이고 논리적이다. 지적동의는 이끌어 내지만 우리의 가슴 속에까지 파고들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대한 지식은 풍부하지만 말씀대로 적용하며 살아가는 일은 모두가 힘들어한다. 그리고 '설교'라는 언어의 뉘앙스는 지루하고, 딱딱하고 진부한 것이다. 사람들은 점 점 좋은 설교를 찾아 이곳 저곳 교회를 옮겨다니지만 그들의 삶이 변화하는 일은 드물다. 모두가 상상력의 부재에 기인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이 한가지로 이러한 현상을 다 설명하고 있다는 한계는 있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통찰력이라고 생각한다. 1부에서 주장의 핵심을 적절한 예를 들어 설명하는 저자의 글 솜씨는 마치 한편의 설교와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진부한 것이 아니라 저자의 주장대로 상상력이 가득 담기고, 그림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필체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과 설득력이 강하다. 마치 훌륭한 문학 작품을 한편 읽은 느낌이다. 이러한 설교를 할 수 있다면, 실로 성도들의 삶에 하나의 혁명으로 설교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문자화되기 이전에 구전으로 내려오던 신앙의 전승들은 이러한 생생함으로 수 천년을 살아서 전달되어 왔으리라. 그 내용을 더욱 풍성히 하면서. 틸리히의 상징 개념과 폴 리꾀르의 상징 이론이 갖는 의미가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연상된다. 리꾀르는 성경 본문의 언어들이 갖는 은유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이 있다고 한다.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과거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항상 현재형으로 살아 의미하는 지시체가 언어 자체에 있다고 한다. 이 주장의 장단점을 논하기 전에 언어 자체의 의미이든, 언어에 담긴 의미이든 그 의미가 오늘의 삶 속에 활력으로 살아나지 못할 때, 그 본문은 죽은 것이다. 그러한 설교 역시 죽은 것이다. 생명만이 생명을 변화시키고 풍성히 한다. 그런 면에서 설교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고 전달한다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상상력이 담긴 설교, 청중들에게 상상력을 통해 이미지를 그려보도록 하는 설교, 그것은 유일한 방법이나 최선의 설교 방법은 아닐 지라도 아주 유효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설교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 생활의 대화를 통한 삶도 한층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아쉬운 것은 화려한 언어의 표현을 통한 설교학 이론 뿐 아니라, 은유(metaphor)와 상징의 언어에 대한 이론들을 좀 더 심도있게 함께 소개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작업 역시 책 한 권은 되겠지만 거의 전문 지식이 소개되지 않고 있다. 다만 전달 방식에 있어서의 은유의 역할만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미국의 상황에서 주장되는 내용이다. 상상력이 고갈된 설교의 원인을 사실주의나 실용주의에 두었는데,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아무튼 상상력이 담겨있어야 설교가, 그리고 삶이 살아난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
| 설교는 단지 듣고,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수도관의 비유'처럼 그냥 사람에게 부어주는 설교가 많이 있다. 지시형의 설교가 많으므로 설교를 통해 상상력을 일으킨다는 것이 아주 어렵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아도 설교를 듣고 청중이 상상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설교를 다시한번 생각해본다는 말이 될수도 있다. 그냥 한번 듣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한번 설교를 생각해본다면 훨씬 유익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을 일으키는 설교가 지시형의 설교보다도 훨씬 유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총론에는 공감을 한다. 상상을 일으키는 설교는 청중들에게 능동적으로 설교를 듣는 역할을 하므로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약간 조심스러워 진다. 상상력을 일으키기 위해서 설교에 쓰여지는 은유, 비유, 상징, 풍유등이 적절하게 사용되면 아주 좋지만, 이것이 잘못쓰여지면 바르지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초대교회때나 중세에 아주 유행하였던 '알레고리'라는 방식이 있다. 일종의 풍유이고 상징인데 이러한 알레고리방식처럼 사람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방법은 없다. 그러나, 알레고리방식의 문제가 성경자체의 문맥을 파괴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본래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와 메세지를 전할 수 있다.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주 좋지만 잘못사용하면 성경을 잘못 가르치는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는 거칠게 표현한다면 양날을 가진 면도날같다. 아주 잘 쓰면 유익하겠지만, 잘못하면 전혀 엉뚱한 설교를 할 수 있게 된다. |
| 요즘은 거의 사라져 버려서 거의 인공으로 조성하지 않으 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 생생한 현장성을 지닌 채로는. 짙푸른게 흐트러진 미나리 들과 황색의 흙, 따가운 햇살 아래 쟁쟁거리며 흐르는 시 내. 나는 큰 도시에서 자랐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나는 그 도 시 최후의 '대(大) 자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 다. 개발과 위락이라는 재빠르고, 강력한 구명 아래 지금 은 야구장으로 변해 버리긴 했지만, 어린 시절 작은 언덕 을 넘어 매일마다 또래 친구들과 조잘대며 개구리니, 도룡 뇽이니, 가재니 하는 것들을 잡으러 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머리 속에 살아있다. 책의 종반을 향해 달려갈수록 내 머리 속은 어린 시절의 그 즐거웠던 추억의 시기들의 기억들로 충만해 지고 있었 다. 쟁쟁거리는 물위에 빼곡이 이마를 드러낸 징검다리를 통통 튀어 건너던 기억들이 온 상상을 충만케 하고 있었 다. 책을 읽는 느낌이 그랬다. 징검다리를 깔깔대며 통통거 리던 그 느낌. 그만큼 흥미진진했고, 재미가 있었다. 스릴 을 느꼈다. '상상'이라는 도구에 대해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 인들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다. 시대의 많은 문화 매체 가 '상상'이라는 이름 하에 온갖 부자연스러운 것들을 만들 어 놓고, 그것들로 돈을 벌고 젊은 영혼들을 자극하고, 교 회와 도덕과 전통 가치에서 떠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컨대 교회에서 '상상'이니, '창의력'이니 하는 말을 들 어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성경을 영감된 말씀으로 믿는다 는 고백 하에서, 명백히 제시된 가르침 앞에 무슨 또다 른 '상상'이 필요할 거냐 하는 어설픈 생각 때문인 것 같 다. ''상상'은 죄다.' 그렇지 않으면 '죄에 가깝다.' 조사 를 해 보진 않았지만, 대개의 교회의 어른들의 견해들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다. 그러나 우리의 용어상의 오해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상상'은 '공상'과 같은 것이 아니 다. '상상'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깊이 들어가' 그것을 더 잘 이해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반면, '공상'은 '현실로부 터 잠시 피난하여', 쉴 수 있는 짬을 만들어 줄뿐이다.' 그 렇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형상'을 주셨다. 이 '형 상'은 곧 '이미지'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닮아 그분의 바라 보시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 이것이 곧 '이미지(image)'다. 그 '이미지'를 활용하는 능력이 '상상력 (imagination)'이다. '공상'이나 '환상'과 같이 현실을 도 피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현실 안에서 그 현실에 풍성 한 살과 피를 입히는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상상'이다. 비록 오늘의 시대가 타락한 인간의 상실되고 죄악으로 의도 된 '자기 중심적 형상'의 주도력에 따라 '상상'이라는 이름 을 덮어쓴 '공상'과 '환상'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지만, 우 리 기독인,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주신 세상의 전 영역을 하 나님의 영광을 위해 풍성히 조명해 내는 거룩한 '상상 력'을 품어 낼 책임이 있다. 이 책은 또한 매우 실제적이다. '제 1부 상상력과 삶'에서 는 성경의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상상이 담긴 메시지의 필 요성과 효율성, 은유의 신비한 능력을 개괄적으로 진술한 다. '제 2부 상상력과 성서적인 설교'에서는 실전 설교자들 을 향하여, 그들이 실제 목회 현장에서 접하는 목회의 현상 들(예를 들면, 설교문 작성, 인물 설교, 장례식 설교, 절 기 설교, 강단 유머 등)에 어떻게 상상력을 적용할 수 있 을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사례를 들며 제시 한다. 특별히 2부의 매 장들은 매우 유익하고, 실제 써먹 을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한 책을 통해 또 한 편견이 수정되었다. 독자(이재근)는 간단히 한 권의 책으로 이토록 폭넓은 지식 습득과 가치 전 환을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저자의 수고를 간단히 보면 안 된다. 추천사에서 이동원 목사가 말했듯, 워렌 위어스비 목 사는 미국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분이라는 느낌을 준 다. 어찌 동의하지 않을 수 있으랴! 130 여권의 책을 적시 적소에 한치오차도 없이 인용하는 저자의 박학 다식함과 탁 월한 적용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직접 읽고 완 벽히 정리해 내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어느 목사님의 이 책에 대한 평가가 생각이 난다. '인간 이 가장 편할 수 있는 유일한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은 '화 장실에서 일을 볼 때'이다. 이 시기만큼 심리적, 육체적 안정을 누리는 때가 없다. 모든 깊은 상상과 창의적 아이디 어의 원천이다. 나는 얼마 전 이 곳에서 위어스비 목사 의 '상상이 담긴 설교'를 뗐다. 가히 놀라운 작품이었다. 최고의 상상력을 가지고, 최고의 상상력을 다룬 책을 다 읽 은 것이다!' 좀 과장되었고, 독자(이재근)의 해석이 살짝 가미되긴 했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