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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봄을 살았던 사람들 - 공녀, 환향녀 그리고 위안부..
"빼앗긴 봄을 살았던 사람들 - 공녀, 환향녀 그리고 위안부.." 내용보기
전통시대 동아시아를 유지한 것은 조공질서였다. 조공이란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종주국인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던 행위를 말하며, 이를 통해 주변국들의 군주는 중국황제의 인정을 받아 군신관계를 맺었는데 이를 책봉이라 했다. 원래 조공과 책봉은 주나라가 주변 제후국들과 맺은 관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를 외교역학 관계로 확대 적용한 것은 한무제
"빼앗긴 봄을 살았던 사람들 - 공녀, 환향녀 그리고 위안부.." 내용보기

전통시대 동아시아를 유지한 것은 조공질서였다. 조공이란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종주국인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던 행위를 말하며, 이를 통해 주변국들의 군주는 중국황제의 인정을 받아 군신관계를 맺었는데 이를 책봉이라 했다. 원래 조공과 책봉은 주나라가 주변 제후국들과 맺은 관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를 외교역학 관계로 확대 적용한 것은 한무제였다. 이후 조공과 책봉은 동아시의 기본질서로 자리 잡았다. 이들 조공과 책봉은 중국에게는 그들이 세계문명의 중심이라는 우월성을 확인시켜주었고, 주변국들은 국가안보의 보장과 경제, 문화교류라는 실리를 안겨주기도 했다.


조공을 할 때 당연히 따라가는 것은 자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이었다. 혹은 중국에서 별도로 원하는 물품을 공급하기도 했는데 이를 공물이라 했다. 공물 중에는 사람, 그 중에서도 나이어린 동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공녀였다. 중국은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하여 한족과 오랑캐를 구분한다. 북방의 오랑캐인 흉노, 거란, 여진은 중국을 자주 넘보았으며 때로는 중국대륙을 통치하기도 했다. 한족과 오랑캐가 서로 대립을 할 때 그 틈바구니에 있는 우리는 항상 피해를 보았고 그 과정에서 공녀라는 부산물이 생겨났다. 이 책 [빼앗긴 봄, 공녀]는 전통시대 조공외교 과정에서 이처럼 공녀로 진헌된 사람들을 살펴보는 기록이다. 저자는 원래 논문으로 작성하고자 했으나,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바꾸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사서에서 공녀의 기록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전통시대 공녀의 역사를 한군데 모은 그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역사의 아픈 손가락 하나를 되찾을 수 있었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기 중국의 남북조와 다자간 조공외교를 추진했었다. 공녀가 문헌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구려 장수왕 대였다. 북위가 고구려의 공주를 요구했으나 신경전을 벌이다가 북위의 왕 현조가 급사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고 한다. 중국황실에 처음으로 공녀가 진헌된 것은 통일신라 성덕왕 대였다. 이때 공녀는 신라에서 먼저 진헌한 자발적 공녀였으나 당나라 현종이 공녀를 신라에 돌려보내면서 종결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공녀는 북방민족인 몽골족이 중원에 진출하면서 비롯되었다.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은 고종18년인 1231년 고려에 처음으로 공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공녀의 진공은 흐지부지되었다가, 원나라 간섭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진공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려에서는 공녀차출과 관련하여 국가기구를 만들고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기도 했다. 결혼도감, 과부처녀추고별감, 처녀등록제, 금혼령이 차례로 등장하였다. 이런 정책으로도 공녀선발이 어려움에 처하자 순마소를 통해 어린 여자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공녀의 대상도 처음에는 홀어미, 역적의 처, 승려의 딸 등 천민층에서 구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과부, 처녀로, 그리고 양가처녀로, 이어서 13세 이상 16세 이하 소녀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백성들은 공녀로 선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조혼, 예서제, 딸 숨기기, 긴급결혼, 자결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피하기에 급급했지만, 지배층은 잘하면 후궁이 되어 태자를 낳을 수도 있다며 원에 대한 굴종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이시기에는 다양한 부원세력이 존재했는데 자신의 친딸을 원나라 황제나 고관에게 상납하고 권력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공녀징구는 충렬왕 원년(1275)부터 공민왕4(1355)까지 80여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총44회에 걸쳐 확인된 숫자만으로는 170명의 소녀들이 진공되었다고 한다. 공녀 중에는 원나라 순제의 정비까지 오른 기황후, 원 세조의 총애를 받은 이궁인 등이 있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첩과 시녀생활을 강요당했고, 일부는 병영의 막사로 끌려가기도 했다고 하니 인격체가 아닌 유희물 혹은 공물의 대우를 받은 것이다.


원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공녀가 명나라 영락제 재위기간에 다시 등장한다. 태종8(1408) 영락제의 공녀요구에 조선은 진헌색을 설치하고 13~25세 양갓집 처녀를 대상으로 공녀를 선발했다. 명나라 사신 황엄이 공녀선발을 주도 했으며 5명을 뽑아 은밀하게 북경으로 데려갔다. 이들 5명의 공녀는 모두 영락제의 후궁에 봉해졌다. 이후 영락제는 1차 공녀의 미색이 떨어진다며 1~2명의 공녀를 재차 요구하였고, 지선주사 정윤후의 딸이 최종선발되어 약재구입으로 위장하여 명나라 환관이 데리고 갔다고 한다. 태종17년인 1417년 명은 3차 공녀를 요구했고, 조선은 2명을 선발하여 보냈다. 그중 한명(한씨)은 후궁이 되었으나 나머지 한명은 임신한 경험이 발각되어 외교문제로 비화될 뻔 했으나 영락제의 총애를 받던 한씨의 읍소로 무마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공녀가 진공될 때 아버지나 오빠 등 친족이 이들을 따라갔다. 명은 이들 친족에게 관록을 내려 대우했다. 태종대에 3차례에 걸쳐 공녀로 끌려간 이들 8명은 명나라 황궁에서 벌어진 어여의 난에 휩쓸리면서 자살, 혹은 처형되었고, 살아난 2명도 영락제가 죽으면서 순장자에 포함되어 이국땅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세종9년인 1427년 명나라 선덕제의 요구로 다시 공녀(4)가 선발되었다. 공조판서 성달생의 딸 등 7명이 선발되었으며 명나라 사신은 이들이 탄 가마의 바깥에 자물쇠를 채워서 데려갔다고 한다. 다음해 선덕제가 다시 공녀(5)를 요구하자 한확이 개인적인 출세와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여동생 한계란을 공녀로 보낸다. 세종11년 명은 또다시 공녀(6)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때에는 선덕제가 조선음식을 좋아한다며 요리 잘하는 집찬비녀와 노래와 춤을 잘하는 창가녀를 집중적으로 요구해 창가녀 8, 집찬녀 12인을 선발하여 보냈다. 세종 15년 명은 다시 공녀(7)로 집찬녀만을 고집하여 20인을 뽑아 진헌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14351차 공녀였던 한씨의 유모 김혹이 한씨 사후 10년 만에 돌아오면서 공녀와 같이 끌려간 여종 9, 창가비 7, 집찬비 37명 등 53명이 돌아왔다고 실록은 전한다.


중종 16년 명의 정덕제가 공녀를 요구하여 조선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나 정덕제가 반란을 정벌하고 돌아오다 죽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다. 중국의 주인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고, 인조16년인 1638년 청은 궁궐에서 시녀로 일할 여자(8)를 요구했다. 조선은 6명의 여자노비와 기생을 선발하여 보냈고, 이들의 친족에겐 면천과 면역의 혜택을 주었다. 이후 1641년 청나라는 북경과 한양의 거리가 너무 멀어 공녀를 중단한다고 알려왔다. 허나 효종원년인 1650년 순치제가 등극하면서 9차 공녀를 요구했고 조선은 금림군 이재윤의 딸을 의순공주로 높여 보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들어 공녀는 9회에 걸쳐 165명이 진공되었다. 이중 순수공녀는 17, 나머지는 여종, 내시, 집찬녀, 가무녀 등이었다. 처음에는 명과 조선의 정략결혼차원에서 공녀가 시작되었으나 점차 명황실의 사역인 용도로 변해갔다. 따라서 공녀에 대한 후궁의 품위도 주어지지 않았고, 친족도 황족으로 대우되지 않았다고 한다.


공녀, 그들은 병자호란 때 끌려갔던 환향녀,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끌려갔던 위안부들과 마찬가지로 성을 수탈당했다. 어린 동녀들은 낯선 타국에서 노예처럼 살았다. 약소국가에서 태어낫다는 이유하나로 그들 인생의 봄은 빼앗긴 봄이 되었다. 우리 역사에는 이처럼 짓밟힌 봄의 아픔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잊어버린 채 돌아보지도 않고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봄들을 제대로 알고는 있는지, 잊지는 않았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빼앗긴 봄을 잊지 않는 것만이 우리가 역사 속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위로처럼 생각된다. 계절의 봄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돌아오지만 빼앗긴 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기에..

k*****1 2020.01.14. 신고 공감 14 댓글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