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해보면 지금껏 노동소설이라는 것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제르미날, 어머니, 강철군화, 황혼 중 어느 작품도 읽지 않은 나로서는 어렵다는 말 밖에는 달리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이 책에 손이 갔던 이유는 다름 아닌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오늘날 몇몇 작가들의 작품은 그 아름다운 묘사, 서정성으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각광 받는다. 하지만 그들의 글은 어딘가 모르게 허무하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마지막 장을 덮는 그 순간까지도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현실에 대한 일방적인 외면 속에서 쓰여진 작품은 늘 공허한 메아리로 나의 기억 속에 각인되곤 한다. 그에 반해 지독히도 현실적인 소설들도 존재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글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없진 않지만, 많은 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글을 보고 이야기한다. 너무도 전투적이고 또 투박하다고. 어쩌면 이는 그 글이 지닌 목적으로 인하여 태생적으로 지닐 수 밖에 없는 일종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다룬 네 가지의 소설은 모두 후자에 속하는 글들이다. 각기 다른,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열망(?) 속에서 빚어진 이야기들이기에, 비슷한 틀 안에서 해석이 가능했다. 등장인물들의 생김새에서부터 지독히 상징적인 것들이 묻어난다. 이 모든 상징들은 너무도 표면적이어서 특정한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계급적 위치에 속한 등장인물들은 서로 너무도 판이하게 대비되는 생김새를 하고 있으며, 서로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구조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소설 속에서의 투쟁은 결코 승리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묘사가 살아있었다. 자신의 계급 위치에 따른 계급 의식에 눈을 뜨고 더 나아가 당장은 실패했을지도 모르는 혁명의 시도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소중한 경험을 함으로서 등장인물들은 미래에 대해 오히려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제목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러한 노동소설은 혁명의 요람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존재치 않는 예술성으로 인하여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오히려 너무도 투철한 혁명의식을 드러냄으로써 그 목적인 대중들에게 혁명의식을 고취시키는 시도조차도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적인 두 축이 묘한 조화를 이룬 경우도 존재한다. 저자는 김수영이나 브레히트를 꼽는다. 그들의 작품은 그 안에 내포된 수많은 의미에도 불구하고 문학으로서의 감수성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책을 모두 읽은 지금, 나는 다시금 묻는다. 노동소설이 독창적인 문학의 한 분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진정한 의미의 노동소설이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에 대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