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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어느 가족(2018), 원더풀 라이프(200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걸어도 걸어도(2009)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몇 편을 만났다. 그 중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고감독님의 작품인줄 모르고 만나기도 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처럼 찾아서 만난 영화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고감독님의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어준 <어느 가족>이 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은 중간 즈음 멈췄으니 제외하기로 한다)
그의 영화를 만나면 스스로를 향한 나 자신의 시선과 타인과의 관계(그 관계에는 ‘가족’ 역시 포함된다)에 대해 한동안 곱씹게 된다. 언뜻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라 생각할 수도 있을텐데, 그렇게 이야기들을 되새기다보면 영화와는 무관해 보이던 일상과 닿아있는 상념들이나 감정의 이면에 숨겨진 상처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도 된다. 이웃 말순님의 글로 이 책을 알게 되었을 때 주저 없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런 생각들이 내 안에 고여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처음 페이지를 펼쳤을 때는 많은 부분이 정치적인 이슈와 닿아 있어 내 예상과 다른 전개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영화감독이니 당연히(이 역시 선입견일테지만) 영화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룰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이 책 이전에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이 출판되었다는 것은 책을 읽는 도중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국가’나 ‘국익’이라는 ‘큰 이야기’로 회수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영화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큰 이야기’ (오른쪽이든 왼쪽이든)에 맞서 그 이야기를 상대화할 다양한 ‘작은 이야기’를 계속 내놓는 것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해왔다. p.25
그렇다면 그들에게 자신의 행위를 총괄하라고 강요하는 우리는 일장기와 기미가요가 완수해온 역할을 어떤 형태로 총괄한 걸까? 사죄는 끝난 걸까? ‘침략 전쟁은 없었다’는 식의 주장이 큰 목소리로 들려오게 된 현재 상황 속에서, 일본인이 50년 전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사자 의식을 가지고 생각하고 있을까? p.49
상대의 이름을 빼앗는 것도, 땅을 빼앗는 것도, 문화를 빼앗은 것에 대한 책임도 60년간 유야무야 내버려두면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 오늘날의 일본 사회가 열두 살 소년을 살인으로 향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사회는 그 소년에게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나쁘다’고 가르쳤던가? 약자를 폭력적으로 지배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던가? 가르친 건 그 반대 아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사회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사회 개혁에 피 흘릴 각오를 하는 것이 정치의 본래 역할 아닌가? pp.53-54
오늘날 일본 정치권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 능력 아닐지요. 그들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 위해서만 언어를 씁니다. 그것이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상상력도, 듣는 능력도 없습니다. p.89
이름과 땅과 문화를 빼앗겼던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에 유독 크게 와닿는 대목들이 있었는데(격하게 고개를 끄덕여가면서 말이다), 책의 중간을 넘어가다보니 이 글이 과연 특정 ‘국가’에만 해당하는 것인기 싶어졌다. 창씨개명과 무력을 앞세운 영토 침략이 아니더라도 현대사회를 살고있는 우리도 타인의 이름을 무시하고 나와 다른 문화에 대해 비하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을 나를 포함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라 당연시 여기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얼마나 당당하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 안의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자기와 모습이 다르거나, 다른 신을 믿거나, 다른 형태로 생활하면 ‘왠지 기분 나쁘다’는 거겠지요. 이해가 안돼. 그래서 무서워. 그렇다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될 텐데요...... 미디어는 그것을 위해 존재할 텐데, 지금은 반대로 상호 이해(대화)에 방해되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에는 ‘반대로’ 그들이 보기에는 우리도 충분히 꺼림칙하지 않은가 하는 시선이 아무래도 빠져 있는 듯합니다. p.79
이런 그의 생각들이 영화에 담겨져 있었구나, 생각하니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되새겨지던 불편함이, 한없이 곱씹어 생각에 빠지게 했던 질문들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상대의 언어로 이야기하기’ 위헤서는 우선 철저하게 상대의 언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테면 제가 쓰는 ‘희망’이라는 말과 상대가 쓰는 ‘희망’이라는 말이 과연 같은 의미인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다릅니다. 거기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인생을 걸어왔고 상이한 가치관으로 살았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다르다’는 것이 대전제이고 그 위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모색해 나갑니다. p.88
타인은 나와 다르다는 ‘당연’하지만, 종종 잊곤 하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서로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다양성을을 강조하면서도 자꾸만 극단으로 치달아 편협해져가는 우리 사회에 절실한 자세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항상 그러하듯,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부터 잊지말고 지켜야할 덕목이다.
상상력이 중요하다고들 여기저기서 거듭 말하는데, 이건 딱히 상대의 기분에 동화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 그리고 그런 그들이 보는 우리의 것과는 다른 세계상을 상상하고 인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런 ‘타자’에 대한 상상이 훨씬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p.81
*나에게 적용하기 하나.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기(적용기한 : 지속) 두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찾아보기(적용기한 : 11월 중) *가장 먼저 보고 싶은 영화는 ‘태풍이 지나가고(2016)’
*Joy가 만난 고감독님 영화들 하나. 바닷마을 다이어리 바다고양이 식당에 가보고 싶다 : http://blog.yes24.com/document/9906806 두울. 어느 가족 아빠가 되고 싶었던 그와 엄마가 되고 싶었던 그녀 : http://blog.yes24.com/document/11223974 세엣. 원더풀 라이프 단 하나의 소중한 추억 : http://blog.yes24.com/document/13779698 네엣.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그렇게 가족이 된다 : http://blog.yes24.com/document/13830913
*기억에 남는 문장 나만 안전지대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다는 건 어리광 섞인 오해이며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p.24
영상 제작자(전달자)는 시청자에게 그런 사유를 요구하기에 앞서, 먼저 스스로 거울을 앞두고 철저하가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p.50
지금, 현재만의 정서적 반응이나 판단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자기 안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행위의 정당성을 제대로 확인해야 합니다. 거듭해서요. pp.69-70
아키 씨는 메일에서 “반대만 하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달리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으셨는데, 지금 그 질문에 대답한다면 ‘그럼에도 끝까지 계속 반대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p.70
그렇게 손에 넣은 모두가 비슷한 집에 살고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가치관 속에서 생활한다는 ‘안도감’, 사실 그것은 생물로서의 다양성을 잃는, 인간에게는 매우 불건강한 사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봅니다. p.81
‘말’은 정말 어렵습니다. 상대에게 가닿을 말로 이야기하는 건 웬만해선 힘들다고 생각해요. p.88
“나는 참배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야. 뭐가 나빠!” 라는 건 그저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일 뿐, 그 말과 행위가 어떤 형태로 상대에게 가닿을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무책임한 자기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건 표현조차 아닙니다..(중략)..애초에 아무리 본인이 ‘사적인 참배’라고 말해봤자, 국내외에서 정치적 파문이 일고 있는 시점에서 그건 공적인 행위입니다. 본인이 사적인 참배로 생각하거나 말거나 그건 본인에게 말고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pp.89-90
말이란 입에서 나온 시점에 절반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p.91
미아가 되었을 때 그 아이를 덮치는 불안은 아마도 부모를 잃었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닐 것이다. 그건 나 따위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 ‘세계’, 그리고 그 무관심과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된다는 커다란 당혹감이다. p.103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고 감싸주는 존재의 곁을 떠나 ‘타자’로서의(그것이 선의든 악의든) 세계와 마주하는-사람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언젠가는 누구나 경험해야 할 이런 뜻밖의 만남을 예행연습으로서 폭력적으로 강제 체험하는- 것이 미아라는 경험 아닐까. 바로 그래서 미아는 갓난아기처럼 울부짖는 것이다. pp.103-104
그리고 제아무리 울어봤자 이제는 고독하게 세계와 마주해나가야 한다고 깨달았을 때, 소년은 자신이 미아라는 점과 결별하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그때를 경계로 어머니는 자신을 감싸 안아주는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한구석에서 자신을 기다려줄 뿐인 조그만 존재로 변한다. 한때 미아였던 어른은 그것을 깨달은 순간 이번에는 남몰래 운다. p.104
그러나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건 촬영 현장에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빨리 혼자 운전하고 와서 대기실에서 대본을 무릎 위에 펼쳐둔 채 눈을 감고 홀로 대사를 연습하는 키린씨다. p.114
그때 키린 씨가 가진 손도끼는 자기 자신 위로 들려 있다. 남을 향한 엄격함보다 더한 엄격함으로, 그는 본인을 지적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다. 성스럽기까지 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p.115
잘 표현이 안 되지만 바통을 건네받은 느낌이랄까요. “뒷 일은 잘 부탁해” 하며 건네준 것을 소중히 품고 달리자는 각오 같은 것. 그 각오가 있어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해 쓰거나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p.133
아 참, 점심을 먹으러 간 바닷가 레스토랑에서 양조위(!)를 만나서 인사를 했고, 박찬욱 감독의 신작에서 주연을 맡은 송강호 씨와 서서 얘기를 나눴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공식 상영회에 와준 쥘리에트 비노슈 씨와 점심을 함께 먹기도 했네요. 그런 멋진 시간도 있었습니다. p.149 *송강호, 쥘리에트 비노슈를 만나다니, 부러운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중 단연 양조위! 양조위 라니!! (고감독님도 느낌표를 표시하지 않았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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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름을 몰라도 영화 어느 장면을 보여주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장면들이 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어느 뉴스화면에서 스치듯 본 것 같은데 영화이미지처럼 기억되는 것들이. 평범한 장면들이 왜 보는 사람의 마음을 그곳에 머물게 하는 것일까?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모아놓은 어느 날의 짧은 글들을 취사선택해서 그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영화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모두 이름을 알리는 것은 아닌데, 첫 영화부터 혹은 그의 작품 어느 하나부터 감독의 이름을 보게 되는 이유는 그의 글 속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자신의 인생이 잘 이끌려 왔다고 생각하는 저자 스스로의 마음이 이미 그의 영화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을 나이들어 생각해보니 그 때 그 분이 참 많은 배려를 해주셨다고 말하는 부분이 글 속에 자주 나타난다.
협업이라는 영화작업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도 말하는데 그 순간의 이야기는 작지 않다. 예산분배와 자금투입 혹은 다른 곳의 승인이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한 상황에서 감독이 현장을 이끄는 사람으로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들은 이 책에서 심정은 무겁지만 글은 무겁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왜 영화를 계속 찍고 있는지 이해된다.
이 책 첫 부분은 조용한 감독이 젊은 시절 가장 강하게 비판한 것 같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응답자의 말을 이끌어내면서 자신이 기획한 구조에 맞게 서술들을 따옴표에 넣는 기자들의 이야기. 구체적으로 회사 이름을 말하지 않지만 가끔 '이 감독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궁금했던 부분들에 대한 답이 된다. 감독의 직접적인 말이 아니라 말을 옮기는 사람이 자신에게 맞게 언어들을 해체하고 조합했다는 사실에 관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을 <기생충>과 비교하거나 감독의 영화 속에서 정치적인 비판이나 일본관료사회에 대한 대책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언어와 전혀 닿지 않는다. 그는 우라늄 농축액의 유출로 일본심해에서 <괴물>이 등장해서 열도를 일자로 횡단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미제사건들을 놓고 <살인의 추억>을 말하거나 진짜로 눈이 많이 쌓이는 일본 영화감독이지만 일본의 현실을 <설국열차>로 보여주리라 마음먹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 화면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보이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노출하게 한다. 단순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관객들의 눈 앞에 옮겨다 놓기 때문에 평범한 인물들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게 된다. 생각하지 않았던,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던 현대인들에게 잃어버린 가치, 인간이기에 지닐 수 있는 선과 악의 경계에서의 판단, 자신이 선택할 수 없던 일의 결과를 놓고 한 개인의 인성과 감정이 다듬어지는 과정이 그의 영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감독이 일본사회에서 살면서 갖는 기본적인 생각이다. 정치인이나 일본의 특정계층에 관한 자각보다 일반 시민들이 서로의 대상에 갖는 감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 하다. 특히 약자가 더 약한 사람을 향해 보여주는 증오와 잔인한 행동들은 생각해야 할 부분이 많은 지점이 된다. 그의 영화를 보면 삶과 죽음, 어린이와 노인, 완벽함과 부족함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영화보는 시간동안 어느 한 편에 서지 않는다. 그저 그들을 따라가게 한다.
어떤 문제 혹은 뉴스보도 한 줄이 영화를 생각하게 하는 발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동기가 되는 부분은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미지의 대상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단계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다. 자신은 '여기'에 있지만 보지못한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연결해서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저 풀어놓는 행위로 영화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그리고, 현장에서 어린 아이들이나 배우들의 생각이 자신이 생각했던 상황과 다를 때는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하고 자신의 카메라 뒤로 물러나 렌즈를 응시한다. 그래서, 감독은 지휘관이 아니라 먼저 생각하고 판단하되 언제나 변화가능성을 열어둔 타협가의 모습으로 남는다. 자신의 성의 연원을 타인이 주는 불안감이 현대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서술하는 모습 역시 작은 이야기가 그의 영화의 전부와 맞닿아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 마지막 부분은 영화평론가와의 대담이다. 말줄임표 안에 생각하는 감독의 모습이, 조심스럽게 답하는 부분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분일 뿐 자신의 생각이 아닌 부분을 순차적 설명으로 표현하는 부분은 감독이 영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상을 남긴다. 그에게 영화는 표현수단이 아니며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에 따라 감독의 생각을 알아 맞추는 것과는 전혀 다른, 영화 자체가 또 하나의 언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멋있는 장면, 눈에 화려하게 들어오는 장면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어느 장면과 대사가, 살면서 그 때 봤던 그 영화의 그 장면이 자꾸 생각나게 하는 감독. 이 책 역시 그런 감독의 모습과 닮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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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의 영화가 관통하는 메시지를 집요하게 관철시키려고 하는 면면이 있듯, 이 에세이는 그를 닮기도, 영화를 닮기도 했다. 부드럽지만(사실 부드러운 면은 극히 작게 보이고), 직설적이고 조금이라도 오해를 사고 싶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명징하게 전달하고 싶은 고집있고 강단있는 그의 성격이 확고하게 드러나는 점이 재밌다. 단순히 재미로만 그치지 않고 그의 가치관, 정치에 관련된 생각과 사고방식,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확고한 시선, 영화를 만드는 그의 태도, 다큐에 대한 그의 생각, 모든 것에 동의하는 바가 많았고 매우 좋았다. 그의 영화만큼, 이 에세이도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도록 던지는 질문들이 있어 이것은 작은 이야기가 아닌 큰 이야기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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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는 창작자로서 세상과 사람을 잇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실천하는 고레에가 히로카즈 감독의 다짐과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고레에가 히로카즈가 30년 가까이 영화를 만들면서 어떤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영화를 찍으려 했는지, 그 생각의 궤적과 진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질문하며 영화라는 공동체의 미래를 그려가는 성실한 창작자 고레에가 히로카즈를 만날 수 있다.
"여기 모아놓은 글 대부분은 원래 출판할 목적으로 쓴 것이 전혀 아니다. 할 일 없이 무료할 때 평소 생각하던 바를 문득 써두거나 고인이 된 분을 잊지 않기 위한 비망록으로 여기던 것이다. 그러니 이처럼 죽 나열해봐도 공통된 주제나 시점, 관점은 아마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름 아닌 이런 신변잡기이기에 공적인 자리에서는 말로 표현하지 않은 혼잣말이나 한숨에 가까운 감촉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며, 이번에 이렇게 출판의 기회를 얻게 되어 솔직히 기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으로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자리에서 "왜 사회에 이런 '보이지 않는' 가족이 생겨난다고 보는가?"라는 작품 배경으로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취재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고 말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의 말과 다르게 통역되어 해외에서 기사가 양산되는 과정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의견이지만, 이번에 내가 말한 것은 '공동체'의 변화에 대해서였다. 일본은 지역 공동체가 붕괴되고, 기업 공동체가 붕괴되고, 가족 공동체도 3세대 가족이 1세대 가족으로 변했으며 1인 가구도 급격히 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묘사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은 이 세 공동체, 즉 '지역' '기업' '가족'에서 떨어져 나왔거나 배제되어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된 사람들이다. 이것이 이야기의 내측이다. 고립된 사람이 찾는 공동체 중 하나가 인터넷 공간이고, 그 고립된 개개인을 회수한 것이 '국가'주의적 가치관(내셔널리즘)이며, 거기서 이야기하는 '국익'과 자신의 동일화가 진행되면 사회는 배타적으로 변해 다양성을 잃는다. 범죄는 사회 빈곤이 낳는다는 표면적 담론이 뒤로 물러나고 본인의 책임이라는 본심이 세계를 뒤덮는다. 아마 이 '가족'은 그런 말과 시선으로 단죄받을 것이다...... 라는 말도 했다. 이것이 배경이다."
고레에가 히로카즈 감독은 사람들이 '국가'나 '국익'이라는 '큰 이야기'로 회수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영화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큰 이야기'에 맞서 그 이야기를 상대화할 다양한 '작은 이야기'를 계속 내놓는 것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해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 자세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영화제는 나라는 존재가 자명하게 휘감고 있는 '정치성'을 표면화하는 공간이다. 눈을 돌리든 입을 다물든, 아니 그 '돌리고' '다무는' 행위 자체도 정치성과 함께 판단된다. 하지만 이는 물론 영화감독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사회에 참여하는 사람이 원래 지니고 있는 '정치성'일 뿐이다. 일본이라는 나라에만 있으면 의식하지 않고 넘어갈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유럽 영화제에는 이쪽이 표준이다. 지금 나는 그 '관례'를 따르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작품을 메시지를 옮겨 나르는 그릇으로만 보는 태도에서는 작품을 매개로 풍성한 커뮤니케이션이 확산되는 일은 바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영화는 무언가를 고발하거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칸국제영화제에 참석하면서 문화와 국가와 언어의 차이를 초월해 영화만으로 사람과 사람이 이어져 있는 장소이자 시간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랍고 기뻤다고 전한다. 그는 "칸에 와서 내가 속해 있는,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영화 공동체가 웅덩으로서 명확히 가시화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영화제라는 장소에서 내가 느낀 풍요로움의 원천은 조명이 비추는 레드카펫 위의 화려함이 아니라 이 '보이지 않는' 연결을 실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전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2020년 개최 예정인 도쿄 올림픽 유치를 위해 내건 슬로건 중 "지금, 일본에는 이 꿈의 힘이 필요라다"라는 것을 보고, 올림픽은 스포츠라는 문화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장이며, '스포츠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라는 슬로건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전한다. 그는 스포츠와 마찬가지고 예술도 '문화'라면, 이들은 결코 '정치'의 종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문화를 이용하는 것을 외교라 부른다면, 그런 것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영화를 또 하나의 측면인 '문화'로 볼 경우,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건 '영화가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영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요컨대 '국익'이나 저의 이익보다 '영화의 이익'을 우선하는 가치관이죠. 이야말로 영화를 문화로 여기는 일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아무도 모른다>를 '어른'으로서 살아온 한 소년이 우연한 계기로 함께하자는 권유를 받아 야구를 하는, 그야말로 '아이'로서의 시간을 보냄으로써 오히려 영원히 어린 시절과 작별을 고하는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위해 아키라의 말과 행동은 어른의 것으로 묘사해둘 필요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 대해 리얼리티가 결여된 판타지라는 의문을 품은 관객에게 이 영화를 아동 방치 사건의 재발 방지를 목적으로 만든게 아니며, 이 작품을 본 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감상을 가질지에 대해 일절 책임질 생각이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영화를 본 사람의 심리 변화를 알 수 없으며, 보는 사람 입장에서 남의 작품을 접할 때 수동적인 태도로 마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가령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백 명이면 백 명 다 '아동 방치는 잘못됐다, 내버려두면 아이는 큰일 난다.'라고 동일한 감상밖에 가지지 않는다면, 그건 아주 징그러운 일 아닌가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TV 미디어와 관계를 맺어오며 느끼는 가장 큰 문제점은, 영상 정보는 보는 사람에게 사유를 촉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교단도, 미디어도, 사회도, 감동보다 사유를 추구하는 냉철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개혁도 시작되지 않을 거이라고 이야기한다.
"미디어 종사자에게 지금 요구되는 것은 단순한 정의감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 속에서 스스로를 보려는 자세일 것이다. '대체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 존재인가?' 이 물음을, 옴진리교를 낳은 지금의 일본 사회를 다시 생각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미디어는 바로 그 사유를 위해 기능해야 한다. 영상 제작자(전달자)는 시청자에게 그런 사유를 요구하기에 앞서, 먼저 스스로 거울을 앞두고 철저하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고레에가 히로카즈 감독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만들 대도 생각했지만, 취재 대상에게 자신의 쪽에서 무슨 행동을 취해 상대의 상처를 후벼 파기보다 '듣는' 자세로 그저 곁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상대가 말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귀로서 거기에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수동태, 리액션이다. 고레에가 히로카즈 감독은 영화를 만들때도 이러한 태도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배우와 자신, 작품과 자신, 작품과 관객들과의, 그리고 자신을 봐주실 분들과의 풍요로운 커뮤니케이션의 확산을 목표로 영화 찰영을 다시 시작한다고 이야기한다.
"'말하기'보다 '듣기'가 훨씬 어려운 행위라는 것을 최근 들어 깨달았습니다. 듣는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만약 상대가 없었다면 혼잣말(모놀로그) 혹은 말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 대화(다이얼로그)가 됩니다. "아......" 하는 맞장구 하나로 풍성한 커뮤니케이션으로 변합니다. 토론이란 '말하는' 기술을 겨루는 일이겠지만, 뭔가 그것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평가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듣기'라는 행위, '상대의 마음이나 생각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지금 사람들이 가장 잃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분명 저는 '자기표현'이라는 말에서 모놀로그적인 '일방통행'의 냄새를 감지하는 거겠지요."
고레에가 히로카즈 감독은 다큐멘터리란 '상대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극영화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철저하게 상대의 언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쓰는 '희망'이라는 말과 상대가 쓰는 '희망'이라는 말이 과연 같은 의미인지를 살펴보는 것이고, 거기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작품화할 때 주의를 기울여햐 할 점은 눈앞의 타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언어와 세계관으로 상대까지 덮어버리지는 않았나, 즉 자기표현의 부품으로서 적절한 코멘트만 잘라내어 이쪽 세계에 봉사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상대의 언어로 말하려는 것' '상대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것', 거기서부터 자신의 문체를 형성해나가는, 일견 멀리 돌아가는 듯한 행위 속에서 다큐멘터리는 반짝임을 발견합니다."
이 책에서 고레에가 히로카즈 감독은 어린 시절 미아가 되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을 덮쳤던 불안에 대한 감정을 진솔하게 이야기하여 인상적이다.
"미아가 되었을 때 그 아이를 덮치는 불안은 아마도 부모를 잃었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닐 것이다. 그건 나 따위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 '세계', 그리고 그 무관심과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된다는 커다란 당혹감이다. 그 소외감의 체험이 소년을 공포의 밑바닥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리라.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고 감싸주는 존재의 곁을 떠나 '타자'로서의(그것이 선의든 악의든) 세계와 마주하는-사람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언젠가는 누구나 경험해야 할 이런 뜻밖의 만남을 예행연습으로서 폭력적으로 강제 체험하는-것이 미아라는 경험 아닐까. 바로 그래서 미아는 갓난아기처럼 울부짖는 것이다. 홀로 세계에 내챙개쳐졌다는 공포로 인해 세차게 우는 것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울어봤자 이제는 고독하게 세계와 마주해나가야 한다고 깨달았을때, 소년은 자신이 미아라는 점과 결별하고 어른이 되는게 아닐까. 그때를 경계로 어머니는 자신을 감싸 안아주는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 한구석에서 자신을 기다려줄 뿐인 조그만 존재로 변한다. 한때 미아였던 어른은 그것을 깨달은 순간 이번에는 남몰래 운다."
이 책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 고인이 된 인물들에 관한 진심을 전하는 글들이 묵직한 이야기를 전한다. 특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의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 키키 키린에 관한 단상을 적은 글들이 눈길을 끈다. 키키 키린은 현장에 들어갔을 때 자신의 몸과 공간의 모든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해 파악하려는 배우였다.
"키린 씨가 까다롭게 대하거나 그 결과 때로 울려버리는 상대는 아마 키린 씨와 같은 태도로 역할과 작품, 그리고 키린 씨를 마주하려 하지 않고 애매하게 도망하는 자세를 보인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상상한다. 그만큼 현장에서 키린 씨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수명을 줄여가며 자신과 자기 능력의 한계를 마주한다. 그때 키린 씨가 가진 손도끼는 자기 자신 위로 들려 있다. 남을 향한 엄격함보다 더한 엄격함으로, 그는 본인을 지적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다. 성스럽기까지 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각오를 목격한 나는 이런 배우와 함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가, 그렇게 마음속 깊이 생각한다."
고레에가 히로카즈 감독이 2011년 10월에 적은 글에서 '아버지가 된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직면하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연출하기 전에 느꼈던 생각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실제로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 아버지가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며 부성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제가 직면에 있는 건 '아버지가 된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문제입니다. 다음에 만들 영화는 거기서부터 시작해보려 합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머니는 자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어머니인 듯한데 아버지는 자식에 대해 무언가를 획득해나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될 수 없는 느낌이 듭니다. 그 획득의 방식이나 아이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남자가 날 때부터 알고 있는 게 아니구나 하고 실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신이 없을 뿐일 수도 있지만요. '완전히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느낌이 저에게는 아주 생생합니다. 돌이켜보면 제 아버지도 저와 관계 맺는 법을 몰랐다는 것을 이 나이가 되어 알았습니다. 그것을, 어떤 요인이 있으면 사람은 제대로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또는 되는 수밖에 없는가. 그런 부성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어요."
이 책의 끝부분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정성일 평론가의 대담이 실려있어 흥미롭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일본 바깥에서 영화 작업을 이어간다는 것은 창작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질문에 "저는 제 커리어를 직선적으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간다는 식의 '직선'으로는 인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찍는다는 게 역시 휴식을 될 수 없는 거 같아요. 매우 신선하고 자극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죠. 반대로 일본에서 찍는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는가 하면 그건 또 결코 아닙니다. 또 다른 어려움이 있어요. 그렇게 봤을 때, 한국도 프랑스도 상당히 순조롭게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요."라고 답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이 만든 영화들을 통해 일본 사회에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질문에 "저는 62년생이고 일본 오타쿠 세대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오타쿠 세대는 윗세대인 단카이 세대(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7년에서 1953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가 정치적으로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고, 단카이 세대가 정치 참여, 사회 참여를 실패하는 과정을 봤기 때문에, 그 결과 비정치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오타쿠 세대는 자기 취미 세계에만 함몰하기 시작한 세대이기 때문에 가장 비정치적인 세대일 겁니다. 저는 창작자가 되기 전부터 그런 비정치적인 상황에 늘 위화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저의 베이스가 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스스로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을 의식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깨닫게 되는 건 슬퍼하는 것보다 분노하는 게 더 강할 수 있고, 답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훨씬 더 넓어질 수 있다, 확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아이들이 촬영 현장에 있으면 정말 즐기고 있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 외에 사회에서 처음 마주치는 어른인데 그 어른이 뭔가 진지하게 하고 있는데 무척 즐거워 보인다고 느꼈으면 좋겠다는 고레에다 히코카즈 감독의 대답에서 영화에 대해 순수함과 즐거움을 가지고 대하는 태도가 돋보인다.
에세이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팬이라면 그에 대한 사적인 생각들을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책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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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비롯해 소설, 회화, 사진, 광고 등의 창작 과정은 ‘선택의 연속’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무엇을 (프레임에) 담아낼 것인가’ 나아가 ‘무엇을 담아내지 않을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결정해야하는 선택의 연속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역시 ‘선택’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하나 헤아리자면 열 손가락도 모자라겠지만, 내가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본질적 이유는 당연하게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고민하고 결정한 ‘선택의 결과물’을 내가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갈래의 갈림길에서 유독 그의 마음과 시선을 사로잡았던, 그래서 결과적으로 선택된 영화 속 공간과 사회와 분위기를 내가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선택’의 배경이 담겨있는 한 권의 책이었다. 선택 및 결정이 있기까지 유독 그의 시선이 머물렀던 정치 및 사회 이슈에 대해, 세계관에 대해, 관념에 대해 마음껏 펼쳐 보이는 한 권의 책이었다. 그간 영화에서 구구절절 늘어놓지 못한 선택의 배경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한 권의 책이었다. 그의 영화를, 나아가 그의 선택을 쫓아 유쾌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은 한 명의 독자로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좋아하는 많은 분들께 이 책을 조심스레 추천 드리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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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님의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라는 책이 내 마음속으로‘크게’들어와서 골랐다. 평소 역사나 정치적인 혹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선이 크고 무게감이 큰 이야기를 읽으면 마음의 기울기가 바닥으로 닿는 사람에 속한다. 그만큼 수용하는 힘이 모자라서이다. 작고 소소한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성향이기도 해서 아예 고전을 읽으면서 전작주의로 가거나 작가추천으로 책을 고를 때 도움을 받는다.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 오가와 이토처럼 작고 소소하고 세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내거나 사람의 마음결이 보이는 글을 마음 편히 좋아한다. 더군다나 고레에다 님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여운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는 터라 선뜻 사버렸다. 하지만 차례를 읽어가면서 마음 속에 그늘이 졌다. 아무래도 무리다라고 느꼈다. 정치적 신념이나 비판의 능력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내가 정치권의 공평정대를 운운하고 기자의 신념이나 미디어의 역할, 영화의 기능 등등에 대한 기본조차 없는 사람으로서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의심에 의심이 거듭되었다. 일본의 영화감독은커녕 배우들도 모르면서 그들에 관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진심어린 조의글과 거장들의 업적은 난독증과 같이 활자를 훑기만 했다. 유일하게 아는 키키 카린은 돌아가신 김지영 배우님과 동일시하는 내게 외려 반가운 존재였다. 정성일 님과의 대담글을 다 읽고 책을 덮고나서 깨달았다. 왜 이 책이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여야 하는 지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님은 사람에 대한 기준이랄까, 아주 근본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도덕심이나 공평함, 존중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리고 사람됨을 알아보는 눈이 깊다. 고레에다와 함께 일한 분들은 거장 감독이라서, 세계적인 상을 탄 배우라서가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려는 본질로부터 시작되는 배려로 좋은 사람으로 선택되어진 것이다. 특히 어린아이들과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신선했다. 영화의 장면을 잘 만들어내기 위해 컷을 선택하고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성향을 파악해서 장면을 선택하고 촬영의 우선순위를 배려해 주는 감독이라니! 이 책 제목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는 딱 맞는 제목이다. 역사의 커다란 맥락에는 역사를 가득 채우는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가 있다. 80년대 민주화 항쟁에는 이한열 열사와 박종철 열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최류탄 가스를 마시던 수많은 대학생들의 눈물도 있듯이. 책 속의 그는 짧지만 단호하고, 간결하지만 따뜻한 글로 먼저 가신 영화인들의 인간적인 존경과 나눈 대화를 기억하면서 애도를 한다. 이라크 파병에 대한 소회는 언론의 화살이 쉽게 닿을 수 있는 공인임에도 불구하고 소신있게 발언하는 모습에 절로 숙연해지게 한다. 또한 일본내에서는 공공성과 공동체의 규칙인 도덕과 구분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공공정신은 공동체 도덕을 향한 충성심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는 용감하다. 일본황실에 반기를 드는 일이고, 일본 정부에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일. 일본국민은 정치나 선거에 관한 인터뷰를 공개적인 곳에서 밝히려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이처럼 책을 통해 발언을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젊은 날의 이문열 작가를 보는 듯한 띠지의 사진을 통해서 절로 고개를 끄덕여졌다. 단어의 뜻을 잘 알면 책은 읽기 쉽고 글은 힘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영화를 만들다 보니 작고 섬세하지만 모든 것이 마음과 눈과 귀의 체에 곱게 걸러져 쌓인다. 쌓인 그것들은 살아가는 데 깊은 생각을 갖게 한다.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애쓰게 만들어 결국 사람은 사람에게서 힘을 얻고 살아감을 깨닫게 해준다.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책과 영화가 우리에게 주고싶은 것이다. ‘작은 이야기’를 계속 할테니 그 작은 것에서 힘을 얻어서 ‘큰’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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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족을 가족이게 하는 것은>
한국에서도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하며 사랑받고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는 2018년 <어느 가족>으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며 이미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거장 감독이다. 가족의 이야기를 따뜻하면서도 섬세하게 담아내는 그의 작품들을 평소 좋아해오던 차에 그의 여러 생각들을 조금 더 깊이 알 수 있는 책의 출간 소식은 더없이 기뻤다. 사실 가족사의 이야기는 털어놓기가 쉽지 않다. 유진 오닐은 그의 자전적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쓰고 난 뒤 자신이 죽은 뒤에도 25년 동안은 절대 발표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가족은 또 어떤가. 아무래도 시대를 초월해서 가족 간에는 풀리기 힘든 갈등과 아물지 않는 상처들이 상당히 존재하는 모양이다. 이렇듯 가족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참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것 같다. 가족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변화되어 가고 있다. 가족 공동체가 붕괴되고 1세대가족이나 1인가족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나 혼자 산다'족,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 노마드족(Nomad)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점차 대중화되고 있다. 그런데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보다 더 세분화되고 확장된 가족의 형태들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 가족에는 결핍과 상실이 있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가족, 자식이 죽고 없는 가족, 별거를 통해 갈라진 가족, 아이가 뒤바뀐 가족, 이복자매들로 이루어진 가족, 비혈연 가족 등이 그렇다. 가족 구성원들의 면면에서도 그런 특징들이 보인다. 아이보다 철이 없는 아빠, 어른보다 근심이 많아 보이는 아이, 친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진 아이,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지만 다정하고 가정적인 아빠 등 그야말로 다양한 인물들이 그려진다. 그들은 더없는 슬픔 속에서 저마다의 아픔을 숨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 가족 안에는 따뜻함과 친밀함, 그들만의 어떤 끈끈한 연대가 있다. 그래서 그들이 처한 상황이 결코 희망 없어 보이거나 절망적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결국 가족이라는 것은 혈연관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노력 없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을 가족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 묵직하고도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이래야한다"는 식의 가족관 때문에 그들을 "가족답지 않다"고 여기게 되는 역설에 대해 그는 이야기 하고 싶었다고 한다. 우리는 각자가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한마디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 한마디일 것이다. 세상은 이미 변화하고 있는데 편견과 고정관념에 얽매여 스스로를 혹은 자신의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무슨 자격과 어떤 기준으로 다양한 가족의 형태로 살아가는 이들을 재단하고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제작사에 입사해 연출일을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미디어의 역할에 대한 그의 언급이 눈길을 끈다. 그는 텔레비전 미디어가 시청자들에게 사유를 촉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제작자들 스스로가 상대 안에서 자신을 보는 시선이 없어서라고 일침을 가한다. 이는 그가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는 일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자신의 의무가 세상에 다양한 '작은 이야기'를 내놓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상대의 마음이나 생각에 귀 기울이는 자세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사유의 시작일 것이다. 점점 개인주의가 심화 되고 있는 세상에서 과연 가족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지역, 기업, 가족 공동체가 해체되고 붕괴되어가는 시대에, 그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왔거나 배제되어 보이지 않는 사람들, 아니 어쩌면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일지도 모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러한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그를 통해 희망을 본다. 그가 계속 해나가겠다고 다짐하는 그 작은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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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족을 가족이게 하는 것은>
한국에서도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하며 사랑받고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는 2018년 <어느 가족>으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며 이미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거장 감독이다. 가족의 이야기를 따뜻하면서도 섬세하게 담아내는 그의 작품들을 평소 좋아해오던 차에 그의 여러 생각들을 조금 더 깊이 알 수 있는 책의 출간 소식은 더없이 기뻤다. 사실 가족사의 이야기는 털어놓기가 쉽지 않다. 유진 오닐은 그의 자전적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쓰고 난 뒤 자신이 죽은 뒤에도 25년 동안은 절대 발표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가족은 또 어떤가. 아무래도 시대를 초월해서 가족 간에는 풀리기 힘든 갈등과 아물지 않는 상처들이 상당히 존재하는 모양이다. 이렇듯 가족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참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것 같다.
가족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변화되어 가고 있다. 가족 공동체가 붕괴되고 1세대가족이나 1인가족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나 혼자 산다'족,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 노마드족(Nomad)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점차 대중화되고 있다. 그런데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보다 더 세분화되고 확장된 가족의 형태들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 가족에는 결핍과 상실이 있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가족, 자식이 죽고 없는 가족, 별거를 통해 갈라진 가족, 아이가 뒤바뀐 가족, 이복자매들로 이루어진 가족, 비혈연 가족 등이 그렇다. 가족 구성원들의 면면에서도 그런 특징들이 보인다. 아이보다 철이 없는 아빠, 어른보다 근심이 많아 보이는 아이, 친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진 아이,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지만 다정하고 가정적인 아빠 등 그야말로 다양한 인물들이 그려진다. 그들은 더없는 슬픔 속에서 저마다의 아픔을 숨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 가족 안에는 따뜻함과 친밀함, 그들만의 어떤 끈끈한 연대가 있다. 그래서 그들이 처한 상황이 결코 희망 없어 보이거나 절망적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결국 가족이라는 것은 혈연관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노력 없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을 가족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 묵직하고도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이래야한다"는 식의 가족관 때문에 그들을 "가족답지 않다"고 여기게 되는 역설에 대해 그는 이야기 하고 싶었다고 한다. 우리는 각자가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한마디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 한마디일 것이다. 세상은 이미 변화하고 있는데 편견과 고정관념에 얽매여 스스로를 혹은 자신의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무슨 자격과 어떤 기준으로 다양한 가족의 형태로 살아가는 이들을 재단하고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제작사에 입사해 연출일을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미디어의 역할에 대한 그의 언급이 눈길을 끈다. 그는 텔레비전 미디어가 시청자들에게 사유를 촉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제작자들 스스로가 상대 안에서 자신을 보는 시선이 없어서라고 일침을 가한다. 이는 그가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는 일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자신의 의무가 세상에 다양한 '작은 이야기'를 내놓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상대의 마음이나 생각에 귀 기울이는 자세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사유의 시작일 것이다.
점점 개인주의가 심화 되고 있는 세상에서 과연 가족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지역, 기업, 가족 공동체가 해체되고 붕괴되어가는 시대에, 그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왔거나 배제되어 보이지 않는 사람들, 아니 어쩌면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일지도 모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러한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그를 통해 희망을 본다. 그가 계속 해나가겠다고 다짐하는 그 작은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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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문자를 받고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리스트에 넣은 또 다른 책. 20대에 문화의 시대를 맞은 내 언저리 세대들은 일본 영화가 개방 되었을때의 흥분을 기억할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와 이와이 슌지. 수오 마사유키, 구로사와 기요시 등을 거치고 일본 고전영화들, 구로사와와 오즈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 극장에 걸리는 일본 영화들은 가끔씩 찾아본다. 그 당시의 감흥을 느끼면서 찾아보는 감독은 이제는 고로에다 히로카즈가 유일하지 않을까. 왜 좋은지를 생각하지 않아도 그냥 좋은 몇 안되는 감독이며 영화만큼 글도 좋은 희귀한(아마도) 감독이다. 이 책도 그렇다. 감독이 인터넷에 남겨놓은 글들의 편집본인데 좋은 어른의 바르고 깊은 생각들을 접할 수 있다. 강의를 듣듯이 읽은 두꺼운 책을 끝낸 이후라서 그런지 이런 형태의 가벼운 인터뷰가 연상되는 (실제 뒷부분은 정성일과의 인터뷰로 채워져있다. 수준이 제법 높다. 짧아서 오히려 아쉽다) 에세이가 좋다. 적당히 부담없이 신중한. 좋은 사람과의 작업으로 영화 만들기가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는 작가. 마냥 부러워하기에는 그 자신을 향하는, 그리고 세상을 향하는 시선이 깊다. 절대 우연히 얻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