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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최초의 현대인이라 불립니다. 서구 사회의 역사, 언어, 사상 등 사회의 기틀이 되는 많은 부분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학습자 중심의 교육" 경향을 최초로 정리한 인물이기도 하고요.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어떤 특별한 점이 있었기에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까 궁금했는데, 책 곳곳에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자 했던 호기심이 있다고 하더군요. 사회나 직업, 혈연과 나의 관계, 나아가 하느님과 나의 관계에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지속했다는 점입니다. 호기심은 세상의 근원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아버지의 그리스 철학적 세계관과 어머니의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비교하면서 정립해 나갔습니다. 마니교를 믿는 교육자로 살아가며 탐구한 끝에 그리스도교의 성인이 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 자체가 해답은 모두 하느님께 있다고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과거에도 이런 세상이 있었다는 점이 조금 위안이 되었습니다. 특히 더욱 그런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며 해답을 찾아나갔던 인물이 죽음, 윤리, 사랑, 정의 등의 해답을 하느님에게서 찾아낸 것은 요즘 시대에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힐링이 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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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이름만 들어도 존재감이 무겁게 다가오는 성인(聖人)이다. <고백론>이 그 무게를 더해준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처음부터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영향을 받아, 지금의 존재감을 나타냈다고 봐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장기에는 혼란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급 관리 출신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상급관리자가 되어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잡기를 원했다.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어머니 모니카 성녀는, 아들뿐만 아니라 집안 하인들까지 그리스도교로 인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정체성(나는 누구인가?)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선생님을 비판적인 눈으로 관찰했다. 학교에 대한 실망은 다른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건, 친구들의 대장 역할을 하면서 부터였다. 싸움상대가 되지 않는 친구를 상대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덤볐다. 그 친구는 계속 덤비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손을 들었을 만큼,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단한 용기를 갖고 있었다. 그 용기가 다양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하느님은 왜 악을 방치하실까 아우구스티누스가 평생을 받쳐 다뤄 온 문제이다. 마니교에서 말하는 ‘선신’과 ‘악신’의 논리대로라면, 악을 저지르는 건 악신의 주도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지 않거나 온전히 선하신 분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주어진 이 숙제를 플로티노스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선의 결핍에 지나지 않는다.” 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라 설명한다. 빛과 어둠을 예로 들면, 어둠이나 그림자는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결핍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악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 따라오는 것이, ‘자유 의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잘못에 대한 근원은 인간의 탐욕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당하게 요구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싶어 하는 탐욕이나 움켜쥐고 싶어 하는 욕심을 말한다. 우리가 욕하는 것은 정당한 욕구와 잘못된 욕구로 나누는데, 이를 선택하는 것이 바로 자유 의지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유 자체가 문제라고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 의지의 ‘잘못된 사용’이 죄와 악의 근본적인 이유라고 말한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는 이유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자유 의지로 선택해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거다. 자유 의지가 잘못 사용되었음을 ‘질서ordo’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열등한 것이 우월한 것을 끌고 가면 ‘잘못된 사용’이고, 우월한 것이 열등한 것을 잘 이끌고 가면 ‘올바른 사용’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 의지가 위험한 선물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실수하더라도 올바른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그대로 남기는 것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진정한 표현이라고 봤다. 정말 의미 있게 살아가는 이유를 아는 것은 잘못도 알고 실수도 할 때라는 의미이다. 잘못된 선택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 있을 때에야 진정한 의미에서 좋은 것, 새로운 것, 올바른 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유 의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중요한 선물이다. 여기서 하느님에 대한 오해를 하지 않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 심판관이신 하느님을 바라보기 이전에, 우리를 안아 주시고, 우리가 잘못한 것을 알거나 걱정이 됨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자유를 선물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면 좋겠다고 저자는 당부한다.
이 책은 강연했던 내용을 정리한 내용으로 구성하였다. 총 13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에는 학생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실었다. 그 질문과 답변을 통해 각 강을 다시 한 번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두루두루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성인의 이야기와 고전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모든 것을 아는 데, 징검다리로서 추천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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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Gogito ergo sum) - 데카르트>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니체는 사회주의 철학자로, 심리철학의 분류로도 포함됩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라고 해서, 우리는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인 삼위일체를 믿고, 그 가운데 말씀의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담긴 성경의 중요성입니다. 니체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적했고, 인간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없으며, 악재나, 재난 같은 것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충분히 극복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대체로 "니체와 홉스, 프로이트와 쇼펜하우어" 등은 대체로 신학과 거리가 멀지만,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명제가 옳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스도께 질문을 던집니다. 바로 "소크라테스"가 후배 철학자들에게 <질문법>을 가르쳐서, 철학이란 이성과 지식으로 무장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까지 질문하고, 또 질문하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근현대의 심리학에서도 말하듯, 사람의 성격은 불변합니다. 그렇지만 성격의 장단점이 있음으로, 강점은 지속하고, 단점은 학습과 꾸준한 내적 계발로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긍정적 변화는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사람의 꾸준한 훈련과 노력으로 얻어진 산물이라고 봅니다. 또한 홉스도 사람은 계속해서 가르쳐야 서로 물고 뜯지 않으며, 인생에 회의적인 쇼펜하우어도 신의 은총 같은 것은 반갑지 않나 봅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의 근원은 무엇일까?"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인 아르케가 물이라고 했고, 탈레스의 제자들은 아페이온, 공기라고 말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물이며, 데모크리토스는 원자가 모든 것의 근원을 이룬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차후 "양자역학"이라는 과학에 이바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고 싶었던 지혜는 어디에서부터 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신 플라톤주의"였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 세계뿐만이 아니라 가시계의 세계를 인정합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영혼뿐이고, 영혼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상의 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말하자면 우선 <마니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 10년이라는 시간을 본 학문을 통해서 심취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마니교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2가지의 신이 깃들어 있는데, 하나는 선신이고 하나는 악신입니다. 이 두 신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엎치락 뒤치락을 하며 싸우는데, 이것이 영원하다는 것이 마니교의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애초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욕망과 욕정의 인물로, 버리지 못하는 욕구로 인해서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몰입했습니다. 자신의 욕구는 악신이고, 욕구를 억제하는 것은 선신이라 생각해서 자신을 수도하는데 몰입했습니다. 마니교는 기독교의 성서 가운데 구약을 폐기하고, 신약의 좋은 것만 따와서 경전을 만든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의문을 가지고, 한 가지 명제에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인간과 동물, 식물과 함께 선하게 어울리며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다면 "악"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일까요? 이 질문에 마니교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는 참으로 기구합니다. 그의 가정은 유복하고, 신앙심이 강한 성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조금 냉정했지만, 어머니의 성품은 온화하고 자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를 훌륭한 교육하기 위해서 힘을 기울였던 그녀는 바로 "성녀 모니카"입니다. 이 가족의 고향은 신앙심이 깊고 거친 북아프리카였고, 훗날 아우구스티누스가 사제 서품 및, 주교좌 사목처가 바로 <아프리카의 히포 지역> 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는 신앙을 전파하는 선교적 측면에 힘을 쓴 나라로 손꼽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일 카르타고"로 유학을 갔는데, 주체 의식이 강한 그는 교사에게 매를 맞으면서까지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교사의 앞과 뒤가 다른 모습에 회의감을 느꼈고, 그는 학교를 관두고, 자신의 신분보다 낮은 여성과 혼인하여 슬하의 자녀 하나를 남깁니다. 심각한 육체적 욕구를 잘 다스리지 못했던 그는 아들이 생김으로 공부에 열중하게 되었고, 훗날 마니교의 두 번째 지도 계층인 교사 자리를 역임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는 "수사학"입니다. 수사학이란 발표와 웅변, 말재주가 뛰어나도록 공부하는 학문으로, 언젠가 도시에서 유명한 수사학자며, 신학자인 <암브로시우스>의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렇게 유명한 암브로시우스의 간판을 떼기 위해서 직접 찾아가서 그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그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생을 뒤바꾸는 연설에 감명을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스승인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아, 육신의 모든 욕구와 욕정을 주님께 맡기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 속의 "돌아온 탕자"로 자주 비유되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의 여러 가지 육체의 인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음으로, 위화감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긍정과 부정으로 사용해 본 사람으로서, 누구의 가슴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면에 선과 악에 대해서 또렷하게 구분할 줄 알고, 숙달된 사람으로 매사에 "선"을 실천하면서 산다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인지라, 신의 거룩한 은총이 필요합니다. 니체와 홉스, 쇼펜하우어와 프로이트들처럼, 사회와 경제가 달라졌다 해서 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신을 찾지 않더라도, 그가 항상 내 옆에 있음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이겠지요.
주지주의 철학은 '지성'이 풍부해야 좋고, 주의주의 철학은 '의지'가 중요해야 좋습니다. 우리 의지에 분노, 시기, 파괴가 있는데, 의지와 신념으로 그것과 멀리하는 훈련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러나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지성을 통한 의지는 오히려 신의 뜻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하느님께 아주 사랑받는 자녀가 되겠습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존재일까?> 이런 질문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겠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상황은 되돌이킬 수 있는지. 의문과 의심이 든다면 반드시 성인 아우구스티누스께 삶의 길을 물으시길 바랍니다.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우리들의 삶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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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박승찬 지음, 가톨릭출판사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잠시만 걸어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날씨가 꽤 덥다는 생각이 들어 헤아려 보니 이제 여름이더군요. 얼마간 땀을 흘리며 더위와 밀당을 하다 보면 가을이 되고 그다음에는 추위와 밀당하는 겨울이 되겠죠.
계절의 흐름을 경험하다 보면 우리가 각각의 계절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옷만 보더라도 우리는 계절에 맞게 적당한 옷을 골라 입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바로 경험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경험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보완해주는 것이 책일 것입니다. 책 속에 나와 있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지금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깨달음을 얻고 또한 이를 실천함으로써 성장하는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역사적 인물의 삶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역사적인 인물이 처했던 환경이 지금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고민과 좌절을 그때도 똑같이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인물이 명예욕, 성욕, 출세욕 등 갖가지 욕망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우리와 닮은 그저 보통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인물의 가르침은 더욱더 우리 마음에 와닿게 됩니다.
이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600년 전 인물이지만, 급변하는 현대 사회와 비교될 수 있는 로마 제국의 격변기를 살았던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교 사상가입니다.
우리는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김수환 추기경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박승천 교수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공부는 왜 해야 하는가?’, ‘행복, 절망, 불행, 고통에 대한 담론’, 그리고 ‘사랑과 연대의 실천’에 대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거듭된 질문은 끝없는 번뇌를 낳았는데, 집요한 물음의 마지막은 언제나 하나로 모아졌다. 하느님과 영혼. 하느님이 주신 영혼을 아는 일. 그것이 ‘나’를 아는 길이었고,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바라보는 시선이야말로 인간을 규명하는 이정표였다. p.68
내가 누구인지 발견하려면 나의 과거를 제대로, 그리고 올바로 성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p.79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욕심과 오만함을 버리면 작은 실패와 실수도 견뎌 낼 수 있다. p.102
선한 것을 아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 선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다. p.177
잠시 반짝였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행복이 아닌, 바람처럼 스쳐가는 찰나의 행복이 아닌,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것, 빼앗길 수 있는 것, 그것을 추구하는 이는 불행하다. 영원한 진리, 지혜의 근원, 우주를 비추는 빛, 하느님을 마음에 지니는 이는 참으로 행복하다! 행복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나설 필요가 없다. 우리 마음 깊이 행복의 참뜻을 일깨우는 스승이 계신 까닭이다. 내 안에 모신 빛나는 내적 교사, 하느님이 영원한 행복의 길로 이끄시리라. p.196
아우구스티누스는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찾아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추구하는 대상은 무엇보다도 그 대상 자체가 영속적이어야 하고, 다른 이가 빼앗을 수 없도록 우리와 필연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p.201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내면에서 진리와 지혜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이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p.204
우리가 부와 명예에 매달리는 순간, 마치 바닷물을 마신 것처럼 그것에 대한 갈증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렇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p.205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우리에게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무엇이 지혜인지 알려 줄 분이 우리 내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적 교사’이신 하느님이십니다. p.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