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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리 《단풍객잔》, 만개와 낙화의 사이인 봄의 초입에 초추 겨냥하였던 책을...
"김명리 《단풍객잔》, 만개와 낙화의 사이인 봄의 초입에 초추 겨냥하였던 책을..." 내용보기
어제는 벚꽃으로 휘황한 불광천을 십여 킬로미터 달렸다. 오늘은 벚꽃잎 바람처럼 날아다니는 성내천과 양재천과 탄천을 고루고루 칠십여 킬로미터 달렸다. 어제는 러닝이었고 오늘은 사이클인데, 가는 곳마다 사람도 벚꽃잎만큼이나 붐볐다. 불광천은 축제로 들썩여 동네 구석구석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나왔고, 성내천 옆 도로에는 골인 지점에 곧 도착하는 러너들이 마지막 힘을 내
"김명리 《단풍객잔》, 만개와 낙화의 사이인 봄의 초입에 초추 겨냥하였던 책을..." 내용보기

  어제는 벚꽃으로 휘황한 불광천을 십여 킬로미터 달렸다. 오늘은 벚꽃잎 바람처럼 날아다니는 성내천과 양재천과 탄천을 고루고루 칠십여 킬로미터 달렸다. 어제는 러닝이었고 오늘은 사이클인데, 가는 곳마다 사람도 벚꽃잎만큼이나 붐볐다. 불광천은 축제로 들썩여 동네 구석구석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나왔고, 성내천 옆 도로에는 골인 지점에 곧 도착하는 러너들이 마지막 힘을 내고 있었다.


  “홍릉과 유릉을 왼쪽으로 두르고 벚나무 길을 촘촘한 걸음으로 한 스무 걸음쯤 내딛으면 닿을 때마다 가슴을 퉁탕거리게 하는 비밀한 습지가 나온다. 이 습지를 가로지르며 쥬쥬, 치이, 치이 하고 우는 놈은 박새다. 나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어 박새의 울음을 흉내내본다. 잔설에 바짝 얼어붙은 텅 빈 나뭇가지 속을 눈으로 더듬어본다. 아아 한 마리도 없다. 아직도 짙은 겨울의 살얼음 속이다. 내 마음의 습지를 그대로 떠다놓은 듯한 이 골짜기는 영원의 저쪽에서 옮아온 온갖 나무와 새들과 사람의 서러움조차 한 곳에 고스란히 붙박아 둘 기세다. 그러나 이제 몇 밤만 자고 나면 부지깽이를 거꾸로 꽂아두어도 잎을 틔운다는 봄이 올 것이다.” (pp.26~27)


  김명리의 《단풍객잔》은 시인인 작가가 펴낸 산문집이다. 서정적인 시만큼이나 책에 실린 글들도 서정적이다. 지난 겨울에 읽었는데 날이 춥고 눈도 날렸던 걸로 기억이 난다. 제목이 ‘단풍객잔’인데 이런 날 리뷰를 올리는 건 어울리지 않아, 하며 쓰기를 뒤로 미뤘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나만의 핑계로 밀려나고 또 밀려나다 이렇게 벚꽃 절정의 시기에 ‘단풍객잔’이란 제목의 산문집 리뷰를 작성하게 되었다.


  “어느 해였던가, 작업실로 가는 저물 무렵 산길에서 나뭇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개구리를 보고 무척 놀란 적이 있었다. 못된 개구리가 효수를 당했나······ 서늘한 머리 뒤꼭지를 웃음으로 휘저으며 가던 걸음을 재촉했는데, 그것이 먹이를 저장하는 습성을 지닌 때까치의 소행이었다니! 나는 나를 덥석 물어다 청천의 나뭇가지 끝에 휘영청 꿰어버릴지도 모를 때까치 떼가 날아오나, 안 오나 텅 빈 봄하늘을 두리번 살펴보며 집을 나선다.” (p.31)


  하지만 《단풍객잔》에 실린 글들이 단풍 가득한 계절에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나머지 계절에 나머지 풍광에 골고루 번져 있다. 글을 읽으며 이른 글을 써보고 싶다, 몇 번 되뇌었다. 눈에 사로잡히는 광경을 허투루 떠나보내지 않고 아름답게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내가 본 것들을 붙잡아 적을 수 있으면 지금보다 좀더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골짜기에 다시 눈 내리는데 사흘 전 빙판에 미끄러져 퉁퉁 부어오른 팔목이 책상 면에 닿을 때마다 전열선을 스친 듯 찌릿찌릿하다. 본시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면목이 그러하듯 설화雪花에 취했다가 설화雪禍를 입은 셈이 되었다고나 할까.

  새해라고 앞에 붙은 눈이 뒤통수로 움직여가는 것 아니겠으니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사물, 사물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는 후시경의 의미를 자주 되새기라는 경고가 아니겠는가 싶다.

  바라건대 올해는 지상에 도착한 시간들이 못된 된꼬까리 만나 시퍼렇게 멍드는 날짜들 조금만이라도 줄었으면 싶다. 다행히도 어디 한 곳 크게 부서진 데는 없어서 오전에 내린 눈 해 저물어서야 치우고 들어와 저녁상 차릴 준비하려는데 애타게 봄을 기다리는 멧새들 동공만 한 눈송이들이 박명의 골짜기를 쉼 없이 휘덮고 있다.” (p.164)


  여튼 그래서 오늘 아내는 자전거 안장 위에서 들썩거리며 우와, 우와를 백 번쯤 외쳤다. 탄천 서울공항 가는 길, 탄천 물놀이장 근처의 왕벚꽃나무를 보면서 우와, 양재천 홍매화를 보면서 또 우와 했다. 함께 달리던 이는 양재천 버드나무를 보면서 뱅 헤어 스타일이라고 알려주었고, 이제 막 사이클을 시작한 또 다른 이의 잔뜩 굳은 어깨 너머로 수양벚나무도 볼 수 있었다.


  “산중에 버려져 품에 안고 왔던 아기고양이가 저만치 컸다. 이름을 향기라 지어주었다.

  산자락아래라 4월이 코 밑인데도 봄이 먼 집마당에서 향기는 봄이 먼저 올지 임이 먼저 올지 하염없이 기달고 있는 듯하다.

  미구에 들이닥칠 꽃봄, 어쩌면 향기는 임과 봄을 함께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오오 앙큼한 봄! 고양이 향기가 온몸으로 봄빛을 진동하는 객잔의 삼월 오후다.” (p.266)


  글을 쓰는 동안 몇 차례 창밖으로 천둥소리 들린다. 낮동안 어렵사리 꽃잎 날리면서 봄을 부지하던 나무들에 비 쏟아지는 소리를 상상하였다. 만개와 낙화의 사이를 한 이틀 달렸더니 마음이 들뜨고도 가라앉는다. 오늘 내게 부딪친 꽃잎들이 오늘 내가 밟은 꽃잎들이 내가 지나온 성하지 않은 세월처럼 좋고도 애달프다. 이제 봄의 초입, 초추를 겨냥하였던 책 《단풍객잔》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김명리 / 단풍객잔 / 소명출판 / 349쪽 / 2021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26.04.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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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그녀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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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리 시인의 산문집 <단풍객잔>을 샀다. 그는 어떤 산문을 쓰는지 알고 싶었다. 첫번째 산문 첫 장, 흰 종이 위에 눈이 내린다.<"어디에 사느냐?" 가던 길 멈추고 내게 묻는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곳.> 몇 장을 넘겨 그녀로 보이는 얼굴을 만난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거지아이들과 놀다가 버스에 올랐을 때 이별이 아쉬워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 속의 그녀, 그녀로 보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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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리 시인의 산문집 <단풍객잔>을 샀다. 그는 어떤 산문을 쓰는지 알고 싶었다. 첫번째 산문 첫 장, 흰 종이 위에 눈이 내린다.<"어디에 사느냐?" 가던 길 멈추고 내게 묻는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곳.> 몇 장을 넘겨 그녀로 보이는 얼굴을 만난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거지아이들과 놀다가 버스에 올랐을 때 이별이 아쉬워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 속의 그녀, 그녀로 보이는. 거지아이는 주머니에서 땟자국 가득한 삶은 계란을 꺼내 그녀의 손에 꼭 쥐어준다. 구걸해서 얻어 아껴둔 계란이었을. 생애 처음 목이 메이게 계란을 먹었다는 그녀의 얼굴을, 그녀로 보이는 얼굴을 한참 본다
s****6 2021.10.0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