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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에게 (by 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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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으로 쉬흔이 된 올해는 유독 많이 아팠다. 이런 저런 검사를 받으러 병원도 많이 다녔다. 누나도 암 투병 중이다. 그러다보니 그 어느 때보다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한 해였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죽음이 온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으나 그것이 나나 내 가족에게도 올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누나가 아프고 나 자신조차 몸이 쇠약해지다보니 내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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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으로 쉬흔이 된 올해는 유독 많이 아팠다. 이런 저런 검사를 받으러 병원도 많이 다녔다. 누나도 암 투병 중이다. 그러다보니 그 어느 때보다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한 해였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죽음이 온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으나 그것이 나나 내 가족에게도 올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누나가 아프고 나 자신조차 몸이 쇠약해지다보니 내가 인간이라는 것, 따라서 결코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에 대해 자각하고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얻게 된 좋은 점은 삶에 대해 겸허해졌다는 것, 그래서 얻게 된 나쁜 점은 종종 불안해진다는 것. 엄밀히 말하자면 그 불안은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것이지만 말이다. 

 

1973년생인 김언 시인의 『백지에게』를 초여름부터 붙잡고 있는데, 이 시집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 역시 불안과 죽음이다. 시인은 불안이라는 감정과 죽음이라는 운명을 두려워하는 것처럼도 보이기도 하고 그것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 시인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또 다른 것은 삶의 무의미함이다. 이 시집에 실린 첫 두 편의 시 제목이 「무의미」와 「사랑」인데, 「무의미」에서 시인은 일상의 반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추석 지나고 설. 설 지나고 추석. 그 사이에 축의금이 있고 조의금이 있고 전화가 있고 

 

내 삶에 어떤 크고 작은 이벤트나 사건이 있는지와 상관없이 삶은 지속되고 일상은 반복된다. 나는 그것을 시인이 '무의미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이해했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은 짐이다. 사랑은 조개껍데기처럼 빛나고 나뒹군다. 아무렇게나 여기 있고 저기 있다. 저기 있고 여기 있다. 어디에 있어도 홀가분하지 않다. 가뿐하지도 않다. 그것은 무겁다. 몹시도 무거운 바다를 보고 왔다. 그리고 웃는 바보들이 있다. 사진 속에만 있다. 도대체 언제적 사진인가?

 

'사랑은 짐이다'라는 단언이 바위처럼 무겁다. 사진 속 나는 아마도 젊은 시절의 나일테고, 그 때는 사랑도 믿고 모든 것들이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소위 '청춘'이라고 말하는 시절은 언제나 미화되기 마련이고 사진은 대표적으로 그런 역할을 하니까 말이다. 사진 속에서 나는 늘 웃고 있다. 시인은 그런 과거의 자신을 '웃는 바보'라고 일컫는다.

 

사랑도 짐이 되고, 모든 좋은 것은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현재'의 나는 모든 것이 무겁고 홀가분하지 않다. 그것이 현재의 '나'이다. 그리고 이런 현재의 나는 죽음과 불안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시집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이자, 시집을 관통하는 관념이다.

 

사랑도 덧없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 일상.

그리고 죽음과 불안으로 점철된 인생. 

 

시인이 요약한 삶이란 이렇다. 1부에서 4부에 이르기까지 계절은 순환한다(내 생각에 그래서 시인은 이 시집을 4부로 구성한 것 같다. 시인은 무의미한 일상과 죽음과 불안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건 중언부언이 아니다. 시집 전체의 구성을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매 부의 구성이 정교하게 그런 일상의 순환으로 짜여졌다는 걸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은 간다. 그러나 그 시간은 축적되지 않는다. 그냥 흐른다. 그리고 일상은 반복된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은 덧없으나 무겁다. 그리고 죽음과 불안은 일상을 잠식하며 조금씩 나를 질식시킨다.

 

이런 비관적인 삶이라니. 미래의 희망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어떤 전망도 불가능하다.

이것이 『백지에게』의 세계이다. 

s*****n 2022.11.19. 신고 공감 0 댓글 0